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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이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담겨 있는 걸 본 탓이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과 노트 한 권, 편지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봉투와 조금 더 두툼한 봉투, 그리고 손수건 세 장.
너무나 하찮은 물건이라 그냥 내버리기 쉬운,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헝겊 인형 하나가 들려 나왔다.
귀가 유난히 긴 토끼 모양의 인형이었다. 헤이번은 플리타가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늘 옆구리에 끼고 있거나 품에 안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로제가 만들어준 인형이라며 제게 자랑을 한 적도 있었다.
‘그건 귀가 하나밖에 없는 미완성품이었는데…….’
그는 귀가 둘 다 제대로 달린 토끼 인형을 무심코 만지작거리다가 혀를 찼다.
아마도 이건 플리타를 위한 선물인 듯했다. 헤이번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느닷없이 그만두겠단 말을, 거짓말까지 동원하면서 하고는 그대로 짐을 챙겨 떠났으면서, 그와 별개로 아이에게 줄 인형을 남겨두다니 말이다.
그냥 돈 몇 푼 주고 산 것도 아니었다. 누가 봐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인형 따위를 볼 줄 모르는 자신이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
헤이번은 이를 악물고는 인형을 다시 상자 안에 넣은 뒤, 다른 것을 꺼냈다. 이번에는 두툼한 봉투였다.
“도대체…….”
그는 봉투를 열어보자마자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들려 있던 봉투가 구겨졌다. 누가 봐도 화를 꾹꾹 참는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제 주인이 저렇듯 화가 난 건가 싶어, 집사가 슬쩍 헤이번의 손에 있는 봉투를 보더니 혀를 찼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헤이번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하고는 입을 열었다.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서 그만둔다 하지 않았나?”
“……예. 로제 양 말로는 그랬습니다.”
집사는 구겨진 봉투를 힐끗 보며 한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헤이번이 그 봉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병에 걸린 플리타를 간호했던 대가로 받은 500세테나는 고스란히 놔두고 갔단 말이지. 야닉, 이게 이해가 되나?”
“…….”
“더 좋은 조건이라 해 봤자 여기서 받던 것보다…….”
헤이번은 침묵하는 집사를 상대로 화를 내다가 입을 다문 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사자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사라져버린 여자를 원망하기보다는, 그런 그녀를 붙잡지 못한 제게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고작 고용인 하나가 제게 말도 없이 나간 것뿐이다. 고용인의 무례에 불쾌할지언정 이렇게 속이 타들어갈 건 아니었다.
하지만…….
헤이번이 다시 눈을 뜨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마저 꺼냈다. 플리타에 관하여 상세하게 적어놓은 노트를 먼저 펼쳐 본 그의 입가에 다시금 허탈한 미소가 스쳤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걱정되어 노트를 남기면서, 대체 왜 그만둔 거야.’
그는 아이에 대한 온갖 것들이 적혀 있는 노트를 훑어보다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집사가 그 모습에 걱정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어이가 없어서 그래.”
헤이번은 노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얇은 봉투를 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돈 대신 편지가 들어 있었다.
[대공 전하.]
노트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바로 그 단정한 글씨로 저를 불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그 위에 제 이름이 겹쳐 보였다.
「헤이번.」
그렇게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으윽…….”
“저, 전하!”
헤이번이 갑작스러운 두통에 편지를 떨어뜨리며 비틀거리자 집사가 사색이 되어 그를 부축했다. 헤이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집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됐네.”
“전하,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신 듯합니다. 주치의를 당장 부를 테니 일단 침실로 돌아가시지요.”
집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향해 충언을 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고개를 젓고는 조금 전 자신이 떨어뜨린 편지를 주워 들었다.
“전하.”
“난 괜찮아, 야닉. 잠시 혼자 있고 싶군.”
헤이번은 집사가 거듭 권하려는 말을 듣기도 전에 잘랐다. 그 단호함에 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명에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헤이번은 그 적막 속에서 다시금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과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꽤 오랜 시간을 망설였으리란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느낌이지만 그랬다. 한 문장을 끝내는 마침표와 그다음 문장을 시작하는 단어 사이의 공백에서 어쩐지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
“……로제.”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편지 속 공백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미처 적히지 못한 뭔가가 이 하얀 여백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아서.
“후우…….”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당장 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일도 여러 건 있었다. 그 모든 걸 내팽개치고 고용인의 방 안에서 그녀가 남긴 편지를 붙들고 있는 꼴이라니.
헤이번은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으며 이번에는 로제가 남기고 간 것들 중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값싼 면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로서는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이건 왜 남겨둔 거지?”
손수건을 펼치는 헤이번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그녀가 남기고 간 다른 건 그나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 손수건은…….
바로 그 순간, 헤이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손수건에 고정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수건의 한쪽 모서리에 놓인 자수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고 해야 했다.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구입한 것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이렇듯 독특한 풍경을 수놓아 판매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이 집어 들었던 손수건의 자수 부분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남녀 두 사람과 말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풍경은 딱히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적한 시골 길가라 하면 어울릴 법한 풍경이었다.
그런 배경을 뒤로한 채 그곳을 지나가던 중에 가벼운 해프닝이라도 있었던 듯 두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약초 더미를 뒤집어쓴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남자.
아마도 약초 바구니를 뒤집어쓴 게 분명했다. 루크가 느닷없이 고개를 들이밀었으니 당연히 놀랐을…….
‘……뭐?’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이어지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미간을 모았다. 방금 자신이 무심코 떠올렸던 게 뭔지 되짚어 보았다.
약초. 루크.
“내가 이 풀더미가 약초인지 어떻게 알고. 게다가…… 이 말이 루크라고?”
헤이번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손수건 모서리에 작게 수 놓인 것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어떻게 확신한 건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한 건, 그런 제 생각이 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손수건의 자수 속 남자가 자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럼 이 여자는…….’
바로 그때, 날카로운 칼날로 후벼파듯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마치 기억하지 말라는 듯. 무의식 깊숙한 곳에 가둬둔 기억이 올라오려는 것을 막겠다는 듯.
“으윽.”
헤이번은 손수건을 꽉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제 머리를 꾹 눌렀다. 이를 꽉 악문 탓에 턱에 힘이 들어가면서 아드득, 소리가 났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다른 손수건을 찾았다. 그리고 잘 개어 놓았던 손수건을 한 장 더 펼쳐 보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작은 오두막의 정경이 수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던 헤이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말없이 손수건을 보다가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으로 마지막 손수건을 펼쳤다.
빨간색의 들꽃.
“……플리타.”
그는 손수건에 수 놓인 꽃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이의 이름이었고, ……그녀가 알려준 들꽃의 이름이기도 했다. 헤이번의 눈이 더욱 빨갛게 충혈되었다.
「음……. 만약 당신의 꿈대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면, 플리타란 이름 어때요?」
「플리타?」
「이 꽃 이름이 플리타거든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명력이 강해서 겨울이 되어도 쉽게 지지 않는.」
빨간색 작은 들꽃을 꺾어 제 머리에 꽂고는 까르르 웃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후욱!”
헤이번은 또다시 밀려드는 두통에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무릎이 꺾여 고꾸라졌다.
“무슨 일……. 전하!”
바닥에 무릎이 부딪치면서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인지 집사가 문을 열었다가 이내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하지만 헤이번은 집사가 다급히 자신을 부르고 제 곁에서 부축해 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로제.”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언제나 무심하고 냉랭하던 남자에게서 나올 법한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 당신이었어. ……당신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전하!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괜찮으십니까?”
집사는 이해 못 할 소리만 중얼거리며 울음을 토해내는 헤이번의 모습에 당황하여 거듭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헤이번은 눈물을 쏟아내는 제 모습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엉망이 된 얼굴을 닦지도 않고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그녀였다.
‘……로제. 내 아내,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
“저, 전하! 어디 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