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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3화 (103/134)

103

헤이번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미간을 모은 채 1층 내부를 둘러보았다.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 모든 게 정돈되어 있었고, 고용인들 역시 저마다 공손히 예를 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신경에 거슬렸다.

“야닉, 플리타는 뭘 하고 있나?”

그는 고개를 힐끗 돌려 제 뒤를 따르던 집사를 향해 물었다.

“예? 아……. 저, 공녀님께서는…….”

집사가 평소와 달리 허둥대며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고작 몇 시간이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것은 말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혹시 선왕비가 또 찾아와 제멋대로 굴었나 싶어 그가 인상을 찌푸린 순간, 2층에서 계단을 향해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의 시선이 저절로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플리타!”

자그마한 아이가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오는 모습에 깜짝 놀란 헤이번이 성큼성큼 다가가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계단 중간쯤에서 만난 플리타가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흐아앙.”

헤이번은 몸을 숙여 아이를 안아 든 뒤,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아이의 작은 몸을 토닥이며 달랬다. 하지만 플리타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품에 안기자 더욱 서러움이 밀려온 듯 숨을 헐떡이며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우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헤이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아이의 뒤편에 로제가 아닌, 하녀장이 서 있었던 것이다.

“로…….”

로제는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왜 이러는 거지? 어디 아픈 건가?”

“아프신 건 아니고…….”

하녀장 역시 헤이번의 물음에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 집사가 제게 보인 반응과 흡사했다.

‘도대체 왜.’

헤이번이 의문을 품고 재차 질문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품에서 울던 플리타가 느닷없이 그의 가슴팍을 작은 주먹으로 때렸다. 아이의 행동에 기겁한 집사가 냉큼 “공녀님!” 하며 외쳤지만, 플리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이번을 향해 원망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빠 미워요!”

“……뭐?”

헤이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플리타는 그런 헤이번의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가 다시금 입에 꾹 힘을 주더니 그의 어깨를 때렸다.

“아빠 미워……. 미워요. 흐잉.”

아이가 울먹이며 때리는 건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작 다섯 살 어린아이가 때려 봤자 고작 깃털로 간지럽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플리타가 저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플리타? 무엇 때문에 내가 밉다는 건지 똑바로 말해 봐.”

“아빠가…….”

플리타는 헤이번의 물음에 대답하려다가 다시 울먹이며 눈물을 닦았다. 그의 딱딱한 말투에 겁을 먹은 듯 아이의 어깨가 움츠러든 게 보였다.

아마 로제가 이 모습을 봤다면 그에게 뭐라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다정히 말씀해 주세요, 전하.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플리타, 무슨 일인지 알아야 아빠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니.”

그는 살짝 누그러진 투로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 아이의 볼을 타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의 다정함을 느낀 것인지, 플리타가 울먹이다 말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금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흐잉, 로제 내쫓았잖아요.”

“……뭐?”

플리타를 달래던 헤이번의 손길이 예상치 못한 말에 멈췄다. 그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다 말고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뭔가 착각하고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하지만 플리타는 제 할 말을 했다는 듯 입을 쑥 내민 채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와 눈을 잠시 마주하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장이 그를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플리타를 달랬다.

“공녀님, 전하께서 로제를 쫓아낸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로제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했고, 전하께서 그 뜻을 받아들여 허락하신 것뿐…….”

“잠깐만.”

헤이번은 제 귓속에 파고든 말에 황당함을 느끼며 손을 들어 하녀장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어이없는 눈으로 하녀장을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로제가 그만두겠다고 했고, 내가 그걸…… 허락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하녀장이 되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집사 쪽을 쳐다보았다. 집사가 그 시선을 받고는 헛기침과 함께 헤이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제 양이 전하께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설마 그게 아니었습니까, 전하?”

“로제가…… 그렇게 말했나? 내게 허락을 받았다고?”

하녀장에게 방금 한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헤이번으로서는 집사에게 거듭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황당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인의 표정을 본 집사가 혀를 차더니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로제 양이 거짓말을…….”

“일단 아이를 침실로 돌려보내고 다시 얘기하지.”

헤이번은 집사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아이에게 로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집사가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플리타.”

“그럼 로제는요?”

플리타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자,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짐하듯 대답했다.

“데리고 오마.”

“정말요?”

“물론.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만 바로잡으면 될 거다.”

“……우웅.”

착오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플리타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로제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것만큼은 이해했다. 아이가 더 이상 울먹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번은 하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하녀장이 고개를 숙인 뒤, 플리타를 품에 안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헤이번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게, 야닉.”

“예, 전하. 오늘 아침, 전하께서 외출하신 뒤에 로제 양이 저를 찾아왔는데…….”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다가 보고했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는 듯 그의 말은 상세하기 그지없었다.

헤이번이 집사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계단을 내려가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제의 방으로 가 보도록 하지.”

“……예? 아, 예. 전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가 잠시 당황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안내를 위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헤이번은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발을 떼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렇듯 갑작스럽게 그만두었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녀가 아이의 곁에, 그리고 이곳에 없다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언제까지나 자신과 플리타의 곁에 있으리라 여긴 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로제를 그렇게 믿었던 건가 싶어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를 이렇듯 온전히 신뢰한 적이 있었던가.

하나뿐인 형제가 의문 가득한 죽음을 맞은 뒤, 헤이번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하다못해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일해 온 야닉이나 페드윈 같은 이들에게도 완벽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로제를 믿었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존재조차 몰랐던 여인을.

헤이번은 스스로에 대한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전하.”

안내를 하던 집사가 로제의 방 앞에 서서 문을 열고는 그 옆으로 비켜섰다. 헤이번은 혼란스러운 속내를 접은 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로제 양이 짐을 챙겨 나간 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방 정리는 전하께 보고한 뒤에 하려고 했기에…….”

집사가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헤이번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여기가 그녀의 방이었다고?’

그는 집사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로제에게서 종종 맡고는 했던 향기가 희미하게 남아 이곳이 그녀가 머물렀던 방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쓸쓸한 풍경에 화가 치밀었다.

방 안에는 본래 갖춰져 있었을 침대와 옷장, 그리고 서랍장과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 외에 달리 더 추가된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작은 장식물 하나조차 놓여 있지 않았다.

짐을 챙겨 나갔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물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헤이번은 굳은 표정으로 방을 살피다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가방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만이 바닥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

‘가방도…… 그다지 큰 게 아니었군.’

바닥에 남은 자국으로 가방의 크기를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고작 옷가지 몇 벌 담으면 꽉 찼을 것이다. 헤이번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나 같이 있으리라 믿었던 저와 달리 로제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걸까.

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이렇게 화를 낼 까닭도 없었다. 고용되어 있다고 해서 평생 노예처럼 이곳에 묶여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플리타를 두고, 그리고 나를 두고…….’

로제를 향한 원망스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순간, 집사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렸다.

“전하, 여기에 로제 양이 두고 간 것이 있습니다.”

“뭐?”

헤이번이 집사의 말에 냉큼 몸을 돌렸다. 집사가 서랍장 옆의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들어 보였다. 작은 상자 안에 뭔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집사에게 다가가 상자를 빼앗다시피 들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쪽으로 몸을 틀고는 그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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