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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신뢰하는 극소수의 이들에게 내린 명이었다. 기억을 잃은 건 적절한 위장이 되었다. 선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방심했다.
그 덕분에 이렇듯 선왕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을 향해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파고들려면 조력이 필요합니다, 전하. 포어킨 후작에게 슬쩍 도움을 청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포어킨 후작?”
헤이번의 푸른 눈이 체스판에 고정되어 있다가 알핀 소백작에게로 향했다. 소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체스말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후작이라면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왕실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라면…….”
“글쎄.”
헤이번이 확답을 미루고는 턱을 매만졌다. 그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물론 소백작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워런 포어킨이라면 충분히 저를 도울 수 있으리란 것도 예상하는 바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선왕’의 죽음에 남아 있는 의문을 해결하겠다는데.
왕실에 광적으로 충성하는 그라면 뭔가 한 가지 의심을 품을 만한 것을 던져 주기만 해도 알아서 움직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지금껏 후작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일단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는 재차 결정을 미루고는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혀를 찼다. 머리로는 소백작의 말대로 후작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후작의 능력이라면 지금 제 가신들이나 수하들이 조사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의 일을 파고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이것이 감정적인 대처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따져봐야 할 일인데 이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걸 알지만……. 후작을 온전히 믿기는 어려워.’
플리타의 생모에 대해 지금껏 침묵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기억 속에서 지워진 여인을 문득 떠올렸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인데, 어째서인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마치 로제, 그녀를 떠올리면 그러하듯이.’
헤이번이 무심코 생각을 이어가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간신히 로제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는데, 또다시 그녀에게로 생각이 돌아온 것이다.
하다못해 제 아이를 낳은 생모를 떠올리다가도 로제를 겹쳐 생각하다니 말이다.
“미쳤군, 정말.”
“예?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소백작은 휘둥그레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체스말을 두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소백작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이제 아셨나 보네요, 전하.”
“…….”
“오늘은 제가 왕을 잡았습니다.”
소백작이 씩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체스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가 이겼어, 알핀.”
“에이, 반응이 너무 심심하지 않습니까.”
소백작은 재미없다는 듯 대꾸하더니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오늘 이상하십니다?”
“……뭘 말하는 거지?”
“대공 전하께서 이렇듯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시는 모습은 아마 처음인 것 같은데 말이죠.”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건 아니지요? 설마 여자 문제 같은 건 아닐 테고.”
소백작이 무심코 덧붙인 말에 헤이번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 반응을 미처 보지 못한 소백작은 제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엄청난 미인이 벌거벗고 달려들어도 인상 한 번 쓰고 휙 밀어버리실, 아니, 손을 대기도 싫어서 그냥 살짝 피해버리실 분이 바로 전하 아니십니까.”
“그렇게 봐 주니 고맙군.”
헤이번은 언제 멈칫했나 싶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서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반응에 시들해진 소백작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돌렸다.
“어쨌든 오늘 기념할 만한 날이로군요. 제가 대공 전하를 꺾다니 말입니다. 하하!”
알핀 소백작의 너스레에 주변에서 체스를 두거나 혹은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다른 귀족들이 관심을 보이려다가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대공이 체스 게임에서 졌다는데 거기에 대고 환호한다거나 할 주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친한 사이인 알핀 소백작이야 저렇듯 너스레를 떨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가 잦아든 뒤, 헤이번이 다시 알핀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게. 쉴라트 쪽에 필요하다면 사람을 더 보내서라도.”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백작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재차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 있던 테이블로 다가가 다시금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대공 전하를 이긴 기념으로 술 한잔하려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나? 내가 살 테니까.”
소백작의 말에 술 좋아하는 젊은 귀족들이 냉큼 일어섰다. 남자들끼리 사교 클럽에 모여 체스니 와인이니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지루하던 터였다. 그들은 이때다 싶어 소백작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클럽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귀족들이 한꺼번에 나가고 난 뒤, 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거나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이들뿐이었다. 헤이번을 귀찮게 굴 만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다.
“…….”
헤이번은 제 앞의 체스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시가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는.
자꾸만 그를 멍하게 만들고 있는.
……로제, 그 여자에 대하여.
‘이미 며칠이나 지났는데…….’
그는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혀를 찼다. 어이가 없었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불러 그날 왜 그런 잠꼬대를 했는지 추궁했어야 자신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헤이번은 그러지 못했다. 되레 로제와 마주칠까 싶어 미리 피한 적도 있었다.
그날 이후 계속.
「왜…… 이제야 왔어요, 헤이번.」
잠결에 저를 보고 미소 짓던 그녀가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두 팔을 뻗어 저를 끌어안았던 일도. 다정하게, 그러면서도 칭얼거리는 투로 제게 말하던 그 목소리도.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얼마나…….」
남편으로 착각하였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무엇보다 로제의 입에서 정확히 제 이름이 나왔다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또다시 원점이로군.”
헤이번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내내 저를 괴롭힌 의문은 도저히 풀릴 길이 없어 보였다. 외려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재차 한숨을 내쉬고는 벗어두었던 겉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클럽의 직원이 냉큼 시중을 들기 위해 다가왔다.
“됐다.”
헤이번은 직원을 향해 손을 내저은 뒤, 직접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밖을 나가려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 길거리에서 비를 맞은 로제를 발견했던 날처럼.
그 기억이 연상된 탓일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하며 클럽을 나섰다.
* * *
“……어?”
로제가 가방을 든 채 길을 걷다가 멈춰 서고는 가방을 들지 않은 다른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빗방울이 톡톡 손바닥에 떨어지는 듯싶더니 이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아.”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이별을 준비하란 말을 들었던 날에도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오더니 이렇듯 저택을 떠나는 날에도 비가 내리는 게 어쩐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비 맞은 저를 데려다줄 사람도 없고, 보살펴줄 사람도 없다. 아픈 저를 보며 울먹거릴 아이도 없고…….
“지금쯤 알았을 텐데.”
로제가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이가 음악 수업을 받고 있는 사이에 집사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곧바로 짐을 챙겨 나왔다. 그러니 아이로서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를 찾았을 것이다.
사라져버린 저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저를 찾는 플리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로제, 로제, 그렇게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미안해, 아가.’
로제는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진 터라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숨을 쉬고 조금 더 살아간다 하여 그 시간이 제게 무슨 의미가 되겠는가.
그저 제 이기심으로 얻은 추억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말라 죽어가면 그만인 것을.
비가 오면서 한적해진 거리를 걷던 중에 뒤편에서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울적해진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마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뒤로 꺾었다. 동시에 로제가 들고 있던 가방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로제의 녹색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머리로 파악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저항했다.
“으읍, 읍!”
그녀는 저를 붙잡은 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사내로 추측되는 자의 힘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비명이라도 지르려 했지만, 제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은 자에게 제압된 탓에 그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제발, 누가 좀 도와…….’
비가 내리면서 사람들이 저마다 실내로 들어간 터라 거리가 한적한 게 로제에게는 불행이었다. 절망으로 일그러지려던 그녀의 눈에 골목 쪽에서 막 나오려던 누군가가 보였다.
“흐읍, 도와…….”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뿌리치고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산을 쓴 채 골목을 나오던 젊은 남자가 그 광경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아…… 안 돼.’
로제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옆에 멈춰 서더니 문이 열렸다. 싸구려 짐 마차의 퀴퀴한 냄새가 습한 공기와 맞물려 더욱 지독하게 진동했다.
퍽.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고, 로제는 마차 안으로 내던져진 저를 의식할 새도 없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목격자를 찾아서 처리해.”
암전이 되기 직전, 어렴풋이 그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