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1화 (101/134)

101

“…….”

집사의 타박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로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무작정 수도에 올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저 얼굴만 봐도 좋겠다, 그랬을 뿐. 귀한 존재를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을 테니 그냥 멀리서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제 이기심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 어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 집사의 말을 듣고 있기만 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이 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듯했다.

“바로 내일부터 그,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곳으로 가는 건가?”

“아, 아니요. 며칠…… 밖에서 머무르면서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그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혹시 제 대답이 이상하게 들릴까 싶어 고심하며 말을 해야 했다. 다행히 로제의 대답에서 수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머무를 곳의 주소를 적어두고 가도록 하게.”

“……예?”

“전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지만 확인이 필요할 수도 있고. 게다가 공녀님께서 로제 양을 찾으면…….”

그럴 경우에 연락을 취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생략했지만, 그 생략된 말을 집사와 로제,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로제는 눈을 깜빡이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집사가 내민 종이에 여관 이름 하나를 적었다.

수도에 처음 올라왔을 때 돈이 부족해 숙박하지 못했던 중급 여관 중 하나였다.

“……흐음. 이 여관에서 머무를 건가?”

“예.”

‘또 거짓말.’

로제는 이러다가 거짓말쟁이가 되겠단 생각에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대공 저에서 나가는 즉시 수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이렇듯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그냥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조용히 죽을 터였다.

“알겠네.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지. 아! 이번 달 급여는…….”

“제가 마음대로 그만두는 것이니, 급여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럴 수야 있나.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인데. 그 또한 여관에서 기다리면 계산하여 보내도록 하지.”

집사는 로제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가 여관에 머무를 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늙은 집사를 보는 로제의 눈빛에 죄책감이 스쳤다.

선한 사람이었다. 충직한 자이기 때문에 헤이번이 이 저택의 관리를 그에게 맡겼을 것이다. 또한 그런 성격이라서 제 말을 의심도 하지 않고 믿는 것일 터.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집사님.”

로제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집사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 갑자기 그만둬야 하나?”

“……죄송합니다.”

“로제 양이 단순히 돈 몇 푼 더 받는다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시시콜콜 물어볼 수도 없고.”

집사의 말에 로제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제 말을 그냥 믿어준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사정’을 추궁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가는 것뿐.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제 개인적인 사정이란 게 헤이번, 그리고 플리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만약 그랬더라면 집사가 이렇듯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동안 수고했네, 로제 양. ……공녀님께는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셈인가?”

“예. 저…… 제 방에 공녀님께 드릴 인형이 있습니다. 공녀님의 유모가 될 분을 위해 별도로 이것저것 적어놓은 노트도 거기에 두고 왔고요.”

“허어, 참……. 그렇게 공녀님을 위하는 사람이.”

집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로제가 그런 그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가냘픈 몸이 잠시 휘청였다.

* * *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로제? 그만두다니요!”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베로니카가 찾아왔다. 로제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다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베로니카.”

“고맙기는요. 내가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그나저나 정말 왜 그만두는 거예요?”

베로니카가 로제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제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 미소를 곡해한 것인지 베로니카가 얼굴을 구기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여기서 온갖 꼴을 다 봤으니 정이 떨어질 만도 하죠. 다들 시기하고, 괜한 말을 퍼뜨리고…….”

“그런 거 아니에요, 베로니카. 모두 고맙기만 한걸요. 특히 베로니카한테는 더욱 그렇고요.”

“고맙단 말 자꾸 하지 말아요. 그런 말 들을 자격 없는데, 그러니까 민망하잖아요.”

“…….”

로제는 베로니카를 쳐다보다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가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삐죽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가방 이리 줘요. 들어줄게요.”

“괜찮아요. 안 무거워요.”

“어휴. 현관까지만 들어줄게요.”

베로니카가 로제의 가방을 빼앗다시피 하여 대신 들었다. 로제가 그런 베로니카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로제.”

“……하녀장님.”

로제는 맞은편에서 다가온 하녀장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베로니카 역시 가방을 들고 있다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하녀장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그 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집사님에게 얘기 들었다.”

하녀장의 시선이 가방에서 다시금 올라와 로제에게 향했다. 무뚝뚝하고 엄한 투의 목소리에 로제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녀장님.”

“됐다.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갈 사람은 가야 하는 법이니까.”

하녀장은 무심한 투로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제는 저를 향한 하녀장의 손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해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옆으로 비켜섰던 베로니카가 보다 못해 로제를 향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악수요, 악수.”

“아!”

그제야 로제가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하녀장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하녀장이 그녀의 손을 꽉 힘주어 잡고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수고했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고생 많이 했겠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갔으면 하는구나.”

“…….”

하녀장의 말에 순간적으로 코끝이 시큰해졌다. 로제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늘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언제나 공평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를 차별하지도 않았고, 편견 어린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공녀님을, 잘 부탁드려요.”

그래서 로제는 플리타를, 자신의 아이를 하녀장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우직한 심성이라면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 믿었다.

“글쎄다. ……솔직히 자신이 없구나. 공녀님이 네가 떠난 걸 아시면 많이 우실 텐데.”

하녀장이 평소 그녀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했다. 그 말에 담긴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제는 그 말에도 불구하고 그냥 힘없이 웃은 뒤, 하녀장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그녀의 눈이 젖어들었다.

헤이번과 플리타, 그들의 곁에 있겠다는 욕심으로 이곳에 들어왔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 역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훌쩍.

베로니카가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뒤, 그녀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때까지 하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로제를 쳐다보더니 먼저 몸을 돌렸다.

그것이 그녀의 이별 방식일 터였다.

로제는 하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금 베로니카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한 손에 가방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 자꾸만 멈춰 서려는 발을 억지로 떼면서.

* * *

“그래서 조금 더 알아보았더니 쉴라트 자작이 연결되더군요. 그 이후에 더클렌 공작가에서 쉴라트 자작가에 광산을 넘겼…… 전하, 듣고 계십니까?”

“……아, 방금 뭐라고 했지?”

헤이번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마주 보고 앉아 체스를 두던, 더 정확히 말해 체스를 두는 시늉을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하던 알핀 소백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쉴라트 자작에 대한 말씀을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더클렌에서 쉴라트에 광산을 양도했더라는 이야기를 막 하려던 참이고요.”

“미안하네, 알핀.”

헤이번이 소백작에게 사과하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늘 단정하던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쪽이 원래 전하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셨던 거지?’

알핀 소백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은근히 호기심을 내보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헤이번이 그를 쳐다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호기심 가질 필요 없어. 별것 아니니까.”

“별것 아니라고 하시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전하.”

소백작이 짓궂게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를 한 번 더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체스말을 옮겼다. 그러자 소백작 역시 잡담을 멈추고 다시 체스말을 옮기며 입으로는 바쁘게 보고를 이어갔다.

헤이번은 소백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내용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 기울여 들었다. 잠시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에 빠져 있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듯 가볍게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선왕, 제 형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기에.

‘사고사’라 하였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아내인 선왕비가 나서서 불행한 사고라 말한 뒤,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 대부분이 그에 동조했다.

분명 더클렌 공작의 입김이 들어간 것일 터였다. 혹은 그 전에 이미 그렇게 말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거나.

거기서부터였다. 그에 동조했던 귀족들의 뒤를 캐내라는 명을 내린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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