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솔직히 이기심일 뿐이었다. 이런 걸 남긴다고, 갑작스럽게 떠나는 제 행동을 용서받을 수는 없을 터.
자신이 떠나고 나면 아이가 얼마나 상처 받을지 잘 아는데…….
플리타의 전담 하녀로, 그리고 이제는 유모로.
그는 자신을 믿고 아이를 맡겼다. 그런데 그 믿음을 저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헤이번에게 기억을 지우는 차를 마시게 했던 날과 다를 게 무엇일까. 떠나보냈던 입장이 아닌, 떠나는 입장이라는 것만 차이가 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떠나야 할 터였다. 제 몸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
로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 한쪽에 담요가 보관되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담요였지만, 그녀는 그것이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끌어안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활짝 열려 있는 가방 앞이었다. 이미 가방 안에는 옷가지 같은 것이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남은 공간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담요를 쑤셔 넣다시피 했더니 간신히 들어가기는 했다.
“…….”
담요를 챙겨 넣은 로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대공 저의 물건인데 제멋대로 가방에 넣었으니 이번에는 진짜 ‘도둑’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담요만큼은 꼭 챙겨가고 싶었다. 헤이번과의 추억이 담긴 것이니까.
이곳, 대공 저에서의.
그녀는 며칠 전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되새겨 보았다. 이별을 준비하라는 치료사의 말을 듣고 한없이 무너져내렸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쓰러진 뒤, 하루 종일 쉬어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마음까지 온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해 계속 뒤척이다가 잠시 정원을 거닐까 하는 마음에 나왔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헤이번과 마주쳤다. 그리고 함께 술을 한잔하자던 그의 제안을 충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때 그는 왜 그런 제안을 했을까.’
로제는 저도 모르게 의문을 품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 기대하는 건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떠나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헛된 기대를 품고, 그것을 핑계 삼아 다시금 이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제 얄팍한 속내가 우스웠다.
‘떠나야지.’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가방을 닫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사가 장부를 검토하다 말고 시선을 들었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로제였다.
“로제 양, 어서 들어오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혹시 공녀님께…….”
“아니요, 집사님. 공녀님께서는 지금 음악 수업을 받고 계십니다.”
플리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급히 묻는 집사를 향해 로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집사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헤이번이 사교 모임이 있어 외출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였다. 그만큼 로제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안 좋아 보인 탓도 있었다.
“그럼 무슨 일인가?”
공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로제가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집사는 쓰고 있던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한쪽에 놓은 뒤, 그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로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뭐?”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모았다. 나이가 들어 귀가 좀 어두워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어 듣는 건 아니었는데……. 집사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품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로제의 말이 이어졌다.
“가능하다면 오늘…… 떠나고 싶습니다, 집사님.”
“뭐라고?”
집사의 주름진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만두겠다고?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맞나?”
“……예.”
로제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집사의 표정이 더욱 황망해졌다.
“잠깐만. 대체 이게 지금 무슨 말인지.”
그는 손을 내젓고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집사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짙게 서렸다.
“갑자기 왜 그만두겠다고 하는 건가, 로제 양? 무슨 문제가 있나? 고용인들 사이에서 갈등이라든가……. 아니면 본인의 처우에 대해 불만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집사님. 다들 잘 대해주시고요. 제가 받는 급여나 그 외의 조건에 대해서도 아무 불만 없어요.”
“그런데 왜 그만두겠다고 하는 거지? 게다가 이렇게 느닷없이.”
집사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로제는 두 손을 꽉 오므리며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둔 핑계를 입에 담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란 걸 들키지 않도록.
헤이번이 나중에 제가 떠난 뒤에라도 자신을 찾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단 건가?”
집사의 미간이 재차 찌푸려졌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대공 저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할 만한 가문이 어디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공 저의 고용인들이 받는 급여 수준이 다른 귀족가의 수준을 상회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조금 웃도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좋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곳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받았다니.
“……예.”
집사의 의심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늙은 집사가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보기는 힘들었다.
“알겠네. 일단 전하께서 귀가하시면 그때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지.”
집사가 혀를 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두겠다는 사람에게 뭐라 하겠는가. 더구나 다른 고용인도 아니고, ‘로제’인데 말이다.
그는 그녀를 대하던 제 주인의 태도를 떠올렸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듯 관심을 둔 적 없는 대공이 로제에게만은 특별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었다. 아니, 결정해서도 안 되었다. 그만두라 허락할 수도, 안 된다고 불허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대공이 결정할 사안이었다.
물론 ‘대공’이 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저…….”
하지만 로제가 그의 말을 듣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집사가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쳐다보자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전하께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드렸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집사는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로제를 보았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려다가 억지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시 한번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 외출하시기 전에 찾아뵙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리가. 전하께서 나가시면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거늘.”
집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로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렸다가는 나가지 못할 테니까.
제 자만심으로 경솔하게 내린 판단이 아니었다. 헤이번은 그만두겠다는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플리타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라도 붙잡으려 할 터였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걸 눈치챈다 할지라도 말이다.
로제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단둘이 함께했던 술자리를 돌이켜봐도 그랬다. 세상 어느 고용주가 고용인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잠든 고용인의 몸에 담요까지 덮어주겠는가.
과분한 친절이고 배려였다. 플리타가 믿고 따르는 유모이기에 가능한.
그래서 오늘, 헤이번이 외출한 사이에 그만두려 한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려고. 그런 제 행동이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더 있다가 그와 아이의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로제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외출하시기 직전에 드린 말씀이라……. 그래서 전하께서 집사님께 언질을 주시지 않았나 봅니다.”
“……흠.”
집사는 미간을 좁힌 채 책상을 두드리다가 로제를 보았다. 온순하고 얌전한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요즘 들어 안색이 좀 나쁘기는 했지만.
‘혹시……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고민하느라 안색이 안 좋았던 건가.’
집사는 무심코 든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분명히 많은 고민을 했을 터였다. 공녀님에 대한 헌신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무려 공녀의 유모가 아닌가. 더구나 대공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고용인이 없으니, 그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외부에 소문이 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제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기에 앞서 헤이번에게 말했단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 감돌던 그 묘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로제 양이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만둘 이유는 없지.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하녀장이 내게 말을 했을 텐데.’
집사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그래, 전하께서는 뭐라 하셨나?”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했다고.”
로제는 목이 꽉 잠겨 나오지 않으려는 말을 억지로 내뱉었다. 거짓을 말하는 입을 다물고 싶었다. 헤이번에게 한 적도 없는 말을 했다고 하고, 그가 말하지도 않은 말을 전하는 제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런 식으로 달아나려는 제가, 겁쟁이에 이기적이기까지 한 자신이.
“그래서 바로 그만두고 나갈 셈인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 상태로 공녀님이나 대공 전하를 뵙는 것도 죄스럽고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그만두는 건 옳지 않네. 공녀님께서 로제 양을 얼마나 따르고 좋아하시는지 잘 알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