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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99화 (99/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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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뒷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로제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신분이 증명되고 누군가의 추천이 없는 이상 대공 저의 말단 하녀가 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냉큼 공녀의 전담 하녀가 되더니 이번에는 유모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조사한 내용을 읽으며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계집이 설마 우리를 맞닥뜨릴 것이란 예상을 못 했을까?”

공작의 금색 눈이 번득였다. 이자벨라는 저와 닮은 아비의 시선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뭔가 제 몸을 지킬 방도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아무 대책도 없이 오지 않았겠지.”

공작이 다시금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러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게다.”

“…….”

“천한 목숨 하나 거두는 거야 쉽지. 다만, 혹여 모를 귀찮은 일을 막으려면 그에 앞서 몇 번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거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이자벨라?”

이자벨라는 공작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로제가 플리타의 생모라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천것이 헤이번의 곁에 단 하루라도 머무르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여자를 계속 대공 저에 놔둬야 하는 거예요?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 여자가 뻔뻔하게 헤이번의 주변에 머무르는 걸 저더러 지켜보고만 있으라고요?”

이자벨라가 울컥하여 공작을 향해 외치고는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못 해요. 용납할 수 없다고요, 아버지. 아니, ……더클렌 공작.”

아비를 향한 호칭의 변화에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딸이 아닌 ‘선왕비’의 표정으로 돌아가 섬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공작의 말대로 죽이는 건 잠시 보류하겠어요. 하지만…… 헤이번의 곁에서는 일단 떼어놓아야겠어요.”

“이자벨……. 선왕비전하, 그것은 좀 더 신중히…….”

제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이자벨라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 듯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더욱 강하게 공작을 향해 말했다.

“그 여자가 대공 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납치하세요. 어차피 무슨 꿍꿍이로 수도에 온 것인지, 무엇을 노리고 그의 곁에 접근한 건지 알아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잡아놓고, 그 여자한테 직접 물어보자고요.”

이자벨라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 *

로제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한참 펜을 쥐고 있었더니 손이 얼얼했다. 그녀는 손을 번갈아 주무르다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썼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노트에 빼곡하게 적힌 내용을 다시금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처연한 느낌을 들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제 감정을 갈무리한 뒤, 다시 펜을 쥐고는 조금 전 쓰다가 중단했던 내용을 이어서 쓰기 시작했다.

[뿔닭 스튜는 공녀님께서 드시고 체하신 적이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또한 아직 어리셔서 채소를 드시지 않으려 하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무화과와 꿀을 졸여 만든 시럽을 곁들인 샐러드를 드리면 잘 드십니다.

그리고 공녀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입욕제는 라일락 향이 나는 것이고, 반대로 재스민 향이 나는 건 강한 향 때문에 싫어하시는 점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공녀님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어드리면 좋아하는 동화책을 말씀드리자면, 일단 요와네스 린던이 쓴 토끼가 주인공인 동화책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외에 카일라 루드윅의 그림책도 좋아하시고요. 대체적으로 파스텔톤의 따스한 삽화가 들어간 책을 좋아하시니까 그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참! 그리고 공녀님께 알레르기가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은…….]

“…….”

빠르게 움직이던 펜이 다시 멈췄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의 틈새로 울음 같은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울음이 나오려 했다. 노트 가득 적은 내용은, 단순히 플리타와 관련하여 주의할 점들을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 문장 하나하나에,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모든 곳에 아이와 함께한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제 배로 낳았지만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갓난아기였을 적의 모습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 때마다 지금쯤 이 정도로 자랐을까, 그렇게 상상만 해 봤을 뿐.

그러다가 직접 눈으로 본 아이였다. 아이가 저를 꼭 끌어안았을 때 그 작은 몸에서 고소한 우유 냄새가 풍긴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제 목덜미에 뺨을 비빌 때면 그 뺨의 말랑말랑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그렇게 하나씩 알게 되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에 대해서.

플리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싫어하는지. 아끼는 장난감이 무엇이고 즐겨 입는 옷이 무엇인지.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머리 모양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것이 전부 쓰여 있는 게 이 노트였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아이를 맡게 될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니,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후우.”

로제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린 뒤, 시선을 돌렸다. 화장대 겸 책상으로 사용하는 작은 테이블 한쪽 구석에 놓인 바구니에는 헝겊 인형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플리타에게 선물하려고 요 며칠 내내 틈날 때마다 만든 것들이었다.

천 쪼가리를 기워 만들다 처박아두었던 것들이 아닌, 제대로 완성한 인형들이었다. 직접 고른 천을 자르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만든.

그리고 아이의 친구가 된 ‘하양이’를 위한 옷도 뜨개질하여 몇 벌 만들어둔 상태였다.

“……뭔가 더 해 주고 싶은데, 해 줄 게 없네.”

로제가 서글픈 미소와 함께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플리타. 내 아가. 엄마가 너무 많이 부족해서 미안해. 너한테 정말 해 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런데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소리 없이 중얼거리던 로제가 숨을 가늘게 내쉰 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구석에 곱게 접어 쌓아놓은 손수건이 보였다. 그것을 본 로제의 눈이 일렁였다.

다림질까지 하여 잘 개어 놓은 손수건은 총 세 장이었다. 로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손수건을 펼쳤다. 귀족 영애나 귀부인들이 쓸 법한 손수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민들이 흔히 사용할 법한, 튼튼한 천으로 만든 손수건이었다.

다만 그 손수건의 모서리 한쪽에 놓인 자수가 특이했다. 갈색 말 한 마리와 풀 무더기를 뒤집어쓴 채 엉덩방아를 찧은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남자.

그녀는 그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헤이번과 처음으로 만난 날을 이렇듯 손수건에 수놓은 것이다.

손수건 안에 다 담아내는 게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럭저럭 수를 놓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두 남녀의 얼굴에 눈, 코, 입을 넣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제 기억 속 그날을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녀가 손수건 안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를 가만히 만져 보다가 그대로 내려놓은 뒤, 다른 손수건을 펼쳤다. 그 손수건에도 수가 놓여 있었다.

로제가 살았던, 헤이번과 함께 살았던 작은 오두막이 그 위에 선명히 그려졌다.

달빛 받아 아늑한 오두막의 풍경.

그녀는 가만히 미소 짓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와 함께 보냈던 밤이 오두막의 정경을 수놓은 곳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러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홍조가 걷히고 미소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마지막 손수건을 펼쳤다.

작고 빨간 들꽃을 수놓은.

……제 아이의 이름을 담은.

로제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듯싶더니 이내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첫 만남. 함께했던 밤. 그리고 아이.

헤이번과의 기억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았다. 그 모든 기억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 굳이 뽑아야 한다면 이 세 가지를 뽑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묻고 싶었다.

당신, 우리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나요.

루크가 제 바구니에 냉큼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죠. 그 바람에 바구니에 담겼던 약초를 홀랑 뒤집어쓴 채 당신을 마주했던 게 첫 만남인데…….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운 만남이었죠?

조금 더 예쁜 모습으로 당신과 마주쳤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루크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애당초 루크 덕분에 지나가던 당신과 그렇듯 만나게 된 거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과 나는 그냥 서로 지나쳤을 테고…….

우리가 그 작은 오두막에서 함께 보낸 날들은 애당초 존재한 적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그랬더라면 플리타도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요.

그러니 루크에게는 아무리 고맙단 말을 해도 모자랄 거예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늙은 말이 마지막 숨을 내쉬던 날, 헤이번은 그의 오래된 친구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루크. 루크.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하지만 지금의 그는 루크를 잊었을 것이다. 아니, 루크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순간을 잊었을 것이다.

“……내 마지막도, 기억하지 말아요.”

로제는 손수건을 쳐다보다가 불쑥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모순된 행동이었다. 제 마지막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떠날 준비를 하면서, 기억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이곳에 이것저것 제 흔적을 남기려 한다.

플리타를 위한 것이란 핑계로 노트를 남기고, 헤이번에게 주려고 손수건에 수를 놓고.

헤이번은 알아보지도 못할, 기억하지 못할 추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이런 식으로라도 남기고 싶어서.

당신의 곁에 내가 잠시 머물렀다고.

당신이 싫어서 떠나보냈던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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