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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가 이어졌다. 헤이번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안주까지 준비하다니, 놀랐어.”
“기본 식재료 정도는 별관의 주방에 항상 보관되어 있으니까요. 금방 만들 수 있는 것들로만 준비했고요.”
플리타의 놀이터 삼아 별관을 종종 이용하다 보니 주방에는 늘 식재료가 넘쳐났다. 그것을 가지고 간단한 안주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가리비는 그냥 찜솥에서 푹 쪄서 내오면 되었고, 연어 샐러드 역시 샐러드용 채소를 곁들여 그 위에 소스만 뿌리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고작 그런 것에 칭찬을 듣는 게 어색해진 로제가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참석했던 와인 파티 중에 지금이 최고인데.”
“……예?”
로제가 그를 쳐다보다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그의 너스레에 손사래를 쳤다. 농담을 한 것이라고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진심이었다. 그는 잔을 들어 와인을 느릿하게 한 바퀴 돌린 뒤,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오랫동안 숙성된 와인의 그윽한 향이 입 안에서 가득 퍼져 나갔다.
종종 이렇게 그녀와 술을 한잔해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제와 그냥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고 와인을 마시는 것뿐인데, 너무나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살던 저답지 않게 긴장도 풀리고, 아늑한 분위기에 감싸여 마음도 한결 누그러지고…….
요즘 들어 저를 괴롭히던 두통조차 싹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잠도 금방 올 것 같은데…….’
헤이번이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뒤, 어깨의 힘을 빼고는 입꼬리를 올린 채 로제를 보았다.
로제는 벽난로의 불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음영이 생겼다.
……언젠가 저 모습을 봤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돼.’
헤이번은 무심코 한 생각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
헤이번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벽난로의 장작이 거의 타들어간 것인지 타닥타닥, 들리던 소리 대신 적막이 감돌았다. 그래서인지 객실 안이 더욱 어둑해져 있었다.
‘……설마 그새 잠이 들었던 건가?’
그는 본인이 생각해도 기가 막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깜빡 잠이 들었던 게 맞는 듯했다. 로제를 바라보던 것까지만 생각이 나니 말이다.
“아, 로제!”
헤이번이 그녀를 떠올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잠든 것을 보고 로제가 자리를 정리한 모양이었다.
“……한심하군.”
상황을 파악한 헤이번의 얼굴이 붉어졌다. 같이 술 한잔하자더니 금세 곯아떨어진 저를 보고 얼마나 황당했을지 생각하니 민망했다.
‘청소까지 끝내놓고 돌아간 건가?’
그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뭔가가 제 몸에서 툭 떨어졌다.
“하……. 담요까지.”
헤이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덮고 있었을 담요를 주워 들고는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플리타의 유모가 아닌, 제 유모 노릇까지 한 모양이다.
그가 담요를 대충 말아서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객실 한쪽 구석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으응…….”
“……로제?”
창문 아래에 놓인 긴 소파에 자그마한 형체가 웅크린 채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헤이번이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설마…….’
그는 담요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조심스럽게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로제가 소파에 모로 누워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던 헤이번이 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미련한 여자였다. 자신이 잠들었으면 그냥 조용히 자리를 떠도 되었을 텐데. 굳이 테이블 정리를 하고, 이렇게 구석진 자리에서 웅크린 채 잠을 청하다니 말이다.
긴 소파라 하지만 그렇다 하여 몸을 쭉 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누워 자는 게 불편할 텐데…….
‘깨워야 하나.’
헤이번은 고민에 빠졌다. 제대로 편히 자게끔 깨워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곤히 잠들어 있는 이를 깨우는 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 손에 들려 있던 담요를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몸이 자그마한 편이라 그런지 담요 안에 쏙 들어갔다.
그 모습에 헤이번이 허리를 숙인 채 재차 미소를 짓는데, 로제가 갑자기 몸을 돌려 누울 듯 뒤척이더니 이내 눈을 반쯤 떴다.
“깼어, 로제? 그럼 침실로 가서…….”
잘됐다 싶어 그가 말을 건 순간이었다. 로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헤이번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건드렸다. 기억 속에 있는 향기였다.
‘아니, 그럴 리 없는데…….’
그의 눈이 흔들린 것과 동시에 로제가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이제야 왔어요, 헤이번.”
“……!”
다시 한번 그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헤이번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제의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얼마나…….”
“……로제?”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다. 그제야 헤이번은 정신을 차리고 저를 끌어안은 로제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깨었던가 싶게 그를 껴안은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설마, 잠꼬대?”
헤이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화를 내는 대신, 그녀를 다시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혔다. 그러자 로제가 잠결에 담요를 끌어당기더니 그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늘 조용하고 얌전하던 모습이었는데, 잠든 그녀는 애교가 많아 보였다. 저를 남편으로 착각하기라도 한 건가 싶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잠결이었다고는 해도, 분명 나를 알아봤는데.’
그녀는 틀림없이 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왜 이제야 왔느냐고. 그런 이해 못 할 말을 했다. 보고 싶었단 말도 하고…….
그 모든 게 ‘남편’이었던 자를 향한 말이라면 이해가 됐다. 물론 그와 별개로 불쾌감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제 이름을 넣는 순간, 모든 게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넘어갔다.
“……대체, 무슨.”
로제를 내려다보는 헤이번의 푸른 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 * *
“이게 정말이에요?”
이자벨라는 아침 일찍 왕궁을 찾은 부친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더클렌 공작이 가져온 서류가 들려 있었다.
“정말로 그 하녀가…… 플리타의 생모란 거예요? 그때, 그 여자?”
“그래. 아, 이제는 하녀가 아닌 모양이더구나. 유모로 승격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자벨라가 공작의 말을 듣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시녀장이 그녀의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녀장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왜 이제 와서 정체를 숨긴 채 헤이번에게 접근했겠어요? 무슨 의도였을지 뻔하잖아요. 분명히 그를 노리고 온 거라고요! 그 영악한 것이……. 순진한 척, 착한 척 굴더니 뒤에서는 그렇게 음흉한 속내를 품고, 감히…….”
이자벨라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노려보았다.
로제의 지난 5년 동안의 행적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서류를 찢어버렸다. 공작이 그런 이자벨라를 보며 눈을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류의 내용은 전부 확인했으니 폐기해도 상관없었다.
“당장 죽여 주세요, 아버지.”
이자벨라의 금색 눈동자가 살기로 번득였다. 하지만 공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하다, 이자벨라.”
“왜요! 그깟 천한 여자 하나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요! 그럼 이대로 그 여자가 헤이번의 주변을 맴도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요? 만약 헤이번의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렇게 되면 당장 그 여자를 알아볼 텐데.”
“기억이 그렇게 쉽게 돌아올 리는 없지. 그럴 거였다면 진작 기억을 되찾았을 게다.”
더클렌 공작은 딸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대꾸했다. 기억을 지워버리는 차를 누군가에게 사용했던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기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자벨라가 공작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공작은 그런 딸을 달래기 위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천한 것이 아무 대책도 없이 수도에 올라왔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자벨라는 공작의 말에 흠칫하고는 되물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살다가 우리의 예상을 깨고 몰래 수도까지 온 계집이다. 공녀를 구하였다는 명목으로 대공 저에 하녀로 들어간 것 자체도 의도했던 일인지 모르지. 대공 저의 하녀가 되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냐?”
“그럼, 처음부터 계획했다는 건가요? 하녀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그래. 지금도 계획대로 뭔가를 하는지도 모르지. 공녀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없었더라도 아마 어떤 식으로든 대공 저에 들어갔을 거다. 그러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을 테니까.”
“…….”
“아주 앙큼한 계집이 아니냐. 이번에 유모의 자리에까지 오른 걸 보면 만만하게 여길 것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