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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밤에 잠을 안 자고 돌아다녀?”
헤이번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채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로제가 살짝 입을 삐죽이고는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왜 안 주무시고 돌아다니셨는데요?”
“……확실히 몸이 좋아지긴 했나 보네.”
헤이번은 제 말을 냉큼 받아친 로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그는 온실 밖을 바라보며 조금 더 제 속을 털어놓았다.
“……깜빡 잠들었다가 깼는데,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더라고.”
“……?”
그의 말을 듣는 로제의 얼굴 위로 근심이 서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물었다.
“지난번에 잠을 설칠 때가 많다고 하시더니, 그래서인가요?”
“뭐……. 그래. 꿈도 많이 꾸고, 머리도 자주 아프고.”
헤이번이 피식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로제를 향해 질문했다.
“너는 왜 잠을 못 자고 돌아다닌 건데?”
“저는……. 그냥,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요.”
질문을 받은 로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
“말 그대로 잡다한 생각요. 그럴 때 있잖아요.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다 보면 잠이 달아나서…….”
“오늘 너무 푹 쉰 모양이군.”
헤이번이 로제의 대답을 듣다가 가볍게 웃었다. 로제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에 걸린 것을 알고 무작정 수도로 왔던 때가 생각났다. 그를 어떻게든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렇듯 길을 떠나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붙들고 바득바득 수도로 온 제가 불쌍했는지, 하늘은 우연이란 이름으로 그를 제 앞에 나타나게 해 주었다.
그날이 선명히 떠올랐다. 대공의 행차에 마땅히 엎드려 예를 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멀거니 서서 다가오는 그를 보았던 날.
그리고, 그런 저를 말 위에 앉아 무심히 내려다보았던 그.
그때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는가.
로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무심하기만 했던 푸른 눈이 이렇듯 웃음기를 머금고 제게 향했다. 늘 서늘하기만 했던 시선 안에 온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서툰 남자가 이제는 아이를 안아주고 편하게 대한다. 플리타 역시 그런 아빠의 마음을 온전히 알았기에 주눅 든 모습을 버리고 밝은 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떠나도 되겠구나.’
로제는 문득 ‘이별’을 받아들였다. 제게 주어졌던 시간을 충실히 보냈고, 사랑하는 이들의 변화한 모습까지 보았으니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그저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었다.
“로제.”
그 순간, 헤이번이 그녀를 불렀다. 로제가 저를 부른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로제의 이름을 부른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제멋대로 입이 열렸다. 그녀를 부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저를 보는 녹색 눈동자를 본 순간, 또 다른 충동이 그로 하여금 다른 말을 꺼내게 했다.
“같이 술 한잔할까?”
“……예?”
사라질 것만 같던 여자가 그 말 한마디에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헤이번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의 효과에 피식 웃었다. 그러자 로제가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요, 전하.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술 한잔하자고 들은 거라면 제대로 들었어.”
“……!”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시선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헤이번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잠 못 자는 사람끼리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어차피 날 밝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라면.”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술 한잔 같이하는 데에도 ‘감히’란 말이 따라붙어야 하나? 그냥 편하게 마시면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었다.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본다면 대공이 제 권위를 이용하여 아이의 유모로 있는 여자를 희롱한다고 여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 그대로 그녀와 ‘편하게’ 마시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래서 번복하지 않았다.
일단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냥 밀고 나가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헤이번은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의 얼굴이 붉어졌으리란 생각을 했다. 온실 안이 어둑어둑하니 제 붉어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
“…….”
로제는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있는데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게 우습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에도 그에 대해 온전히 알았던 게 아니니 그 점을 두고 뭐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불편한가?”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그 시선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한 것인지 헤이번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 물음에 대답을 하자면, ‘아니다’였다.
불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대공’이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였을까.
머쓱해 하는 그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대답한 것은.
“좋아요.”
“……뭐?”
“좋다고요, 전하. 술 한잔하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죠.”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별을 앞두고 딱 한 번의 욕심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속으로 변명을 덧붙였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건지 헤이번이 잠시 그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다시금 그다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 음, 아무래도 사람들 눈도 있고 늦은 시간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별관으로 가는 게 어때?”
“……별관요?”
“그래. 여기서 별관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거든.”
헤이번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제는 자신이 대답해 놓고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어깨에 걸치고 있던 그의 겉옷이 흘러내렸다.
“참, 이 옷…….”
“입고 있어. 밖에 나가면 추워.”
헤이번은 흘러내린 겉옷을 직접 그녀의 목 아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로제는 그의 손길이 목덜미를 스치자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눈빛이 짙어졌다.
“가지.”
하지만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둔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훈훈했던 온실과 달리 바깥은 그새 더 쌀쌀해져 있었다.
“이쪽으로, 아, 길이 조금 좁으니 조심하고.”
헤이번이 정원의 샛길로 안내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로제가 그를 따라가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작게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냥 함께 길을 걷기만 해도 행복했던…….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별관이 보였다. 요즘은 플리타의 놀이터가 된 곳이었다.
‘그런 곳에 몰래 들어가 술을 마신다니…….’
로제가 문득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멈춰 섰다. 그러자 앞서 걷던 헤이번이 뒤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왜?”
“아니요. 그냥…… 공녀님의 공간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뭐, 플리타의 침실 말고 객실로 가지.”
헤이번 역시 그녀의 말에 조금 걸리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이가 사용한 침실이 아닌, 객실. 로제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어간 별관 안은 어두컴컴했다. 1층의 창문마다 전부 커튼을 쳐 놓은 상태라 달빛조차 들지 않았다.
“잠시만요, 전하.”
로제가 불을 켜기 위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헤이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불을 켤게.”
“예?”
“내가 너보다 어둠에 빨리 익숙해진 것 같아서.”
헤이번은 손을 잡고 있다가 놓은 뒤, 천천히 램프가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말마따나 그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불을 켜고는 몸을 돌렸다.
“어디에 더 불을 켤까?”
“아니요. 너무 환해도 혹시 누가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도 없어야 할 별관에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의아함을 느낀 누군가가 찾아올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이기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헤이번이 로제의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램프를 손에 들고 객실 쪽으로 향했다.
“……바깥이나 여기나 거의 비슷한데.”
그는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싸늘한 공기에 인상을 썼다. 별관 내에서도 객실은 아예 사용을 한 적이 없어서인지, 유난히 더 서늘했다.
“안 되겠어. 일단 벽난로에 불부터 피우고.”
“아! 그건 제가 할게요, 전하.”
로제가 그의 말에 냉큼 입을 열었다. 하지만 헤이번이 램프를 벽난로 위쪽에 조심히 내려놓은 뒤, 손사래를 쳤다.
“내가 할게.”
“하지만…….”
“이런 건 남자가 해야지. 게다가 난 장작을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잘 안다고.”
헤이번이 농담을 덧붙이다가 제풀에 놀라 흠칫거렸다.
……자꾸만 그녀에게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저답지 않게, 실없는 놈이라도 된 것처럼 실실거리며.
뭔가 신나는 일을 앞두고 잔뜩 들뜬 소년이라도 된 듯이.
“흐흠. 어쨌든 잠깐만 기다려. 장작을 가져올 테니까.”
그는 스스로의 모습에 당황하여 헛기침을 하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허둥대며 도망치듯 객실을 빠져나가는 헤이번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로제가 문득 그와 비슷하게 몸을 흠칫거렸다.
“……아, 참. 간단한 안주라도 만들어야지.”
램프의 불꽃에 비친 로제의 얼굴이 새빨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