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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일까. 혹은 현실일까.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다.’
헤이번은 희뿌연 안개 너머 홀로 서 있는 여인의 흐릿한 형체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 코, 입은 고사하고 얼굴의 형태마저 흐릿한 터라 그저 사람이라는 것만 구분할 뿐, 그 여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리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가 울음을 닮은 미소를 짓고 있으리란 걸 알았다.
그런 여자이니까.
겉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상처투성이에 외로움도 많이 타면서, 그러면서도 장난도 잘 치고 밝게 웃어주던 그런 여자였으니까.
『…….』
그는 여자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못했다. 분명 그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기억나지 않았다.
헤이번은 다시 입을 벌렸다. 그녀를 부르고 싶었다. 이 꿈이 사라지기 전, 현실이었을지도 모르는 저 여자를 크게 부르고 싶었다.
『당신을 버린 게 아니야. 당신을 잊은 것도 아니야. 나는…….』
그는 손을 뻗으며 그 여인을 향해 달려갔다. 희뿌연 안개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번이 다가갈수록 안개가 딱 그만큼 멀어지는 것인지, 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안 돼.』
헤이번은 고개를 저었다. 애틋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결코 잊지 말았어야 할…….
“로……!”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외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 사이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그는 황급히 손을 털었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카펫에 떨어진 담배가 동그란 자국을 남긴 것을 보다가 혀를 차고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화상 통증 때문이 아닌, 꿈의 후유증 탓이었다.
얼마 전부터 툭하면 제 꿈에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여인 때문에…….
“그런데 내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려 한 거지?”
헤이번은 문득 자신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 했던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름이 뭐였지? 생각이 날 것도 같은데…….’
그가 입을 달싹이려는 것과 동시에 두통이 찾아들었다. 요즘 들어 빈도가 잦아진 두통이 또다시 그를 방해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헤이번은 양손으로 머리를 누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잠들었던 것 같은데 밤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을 자기는 그른 것 같은데.’
꿈도 그렇고, 두통도 그렇고. 헤이번이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 풍경이 그의 푸른 눈에 담겼다.
“산책이나 할까.”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정원을 걷던 헤이번의 발걸음이 멈췄다. 고용인들의 숙소가 위치한 곳 부근이었다.
‘여기 근처일 것 같은데…….’
그는 건물 내부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어림짐작으로 로제의 방이 위치한 곳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똑같은 커튼이 드리운 방 중에서 그녀의 방을 찾는 건 어려웠다. 아니, 방을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누가 보면 변태라고 하겠군.”
헤이번은 스스로 제 행동이 어이없어 피식 웃은 뒤, 고개를 저었다. 젊은 유모의 방이 어디인가 기웃대는 모습이라니. 누가 봐도 못된 마음을 품은 사내 같지 않은가.
그는 미간을 긁적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발길을 돌렸다. 하여간 제 모습이 우습기는 했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는 꿈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가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잠에서 깨어나서는 유모의 방 근처를 기웃기웃…….
“한심하구나, 헤이번 괸터스.”
괸터스란 이름이 아깝다. 그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지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처럼 잠을 못 자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아뿔싸.’
이러다가 정말 고용인의 앞에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겠구나 싶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헤이번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발소리의 주인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
“……전하?”
잠 못 자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제였다. 그녀는 그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헤이번을 볼 거라고 상상도 못 한 곳이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여기는, 어떻게.”
“아, 잠이 안 와서 발길 닿는 대로 산책을 하다 보니……. 그나저나 로제, 너야말로 몸도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이 밤중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지?”
헤이번은 당황한 마음에 허둥지둥 말을 돌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게다가 숄 하나만 걸친 모습이 그를 더욱 못마땅하게 만들었다.
“옷은 왜 이렇게 얇게 입고.”
그가 혀를 차고는 제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로제는 느닷없이 다가온 헤이번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냥 그가 해 주는 대로 그의 겉옷을 걸쳤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이 옷을…….”
“걸치고 있어. 괜히 또 아프지 말고.”
헤이번은 그녀가 제게 겉옷을 돌려줄까 싶어 냉큼 몸을 돌렸다. 로제가 난처하여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용인들 숙소 근처인데 혹여 누가 이런 제 모습을 볼까 싶어서였다.
대공의 겉옷을 걸치고 있다니.
온갖 소문에 소문이 더해지는 데에 하루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지난번에 헤이번과 같은 마차를 타고 돌아왔던 일, 그리고 그 뒤에 도둑 누명을 뒤집어썼던 일을 전부 잊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서 파생되었던 소문이 얼마나 지독했던가.
물론 그 일과 관련하여 다른 고용인들에게 뒤끝을 부리거나 원망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뿐.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 피해를 줄지 모르는 다른 소문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무심코 그와의 ‘끝’을 생각하던 로제가 애써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 주변의 풍경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헤이번에게 겉옷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의 등을 보며 따라온 터라 그가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 안에 자신이 들어온 것이다.
‘대공 저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역시 정원인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 저에서 숱하게 봐 왔던 정원과는 다른 곳이었다. 똑같은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이리 와, 로제. 여기는 내 전용 정원이라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예? 저, 전하의 전용 정원이라고요?”
‘맙소사.’
로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전용 정원에 발을 들여놓다니. 이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더욱 큰일이었다.
“아, 전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이 옷을…….”
“걸치고 있으라니까. 아니, 그래도 밤공기가 서늘하니 온실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겠군.”
헤이번은 로제가 건넨 겉옷을 받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정원 한쪽에 작은 온실이 있었다. 로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어색한 걸음으로 다시 그를 뒤따랐다.
“들어와, 로제.”
그가 온실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마치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로제가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머나…….”
로제는 온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치 계절이 바뀌기라도 한 듯 온몸이 따스한 공기에 감싸이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헤이번이 온실 문을 닫고 들어오다가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온실에 처음 들어와 보는 건가?”
“……예. 처음이에요.”
그녀는 헤이번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는 쓴웃음을 삼켰다. 함께 살던 시절, 그가 한겨울에 툭하면 온실 이야기를 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된 탓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로제. 내가 여기에 근사한 온실을 하나 지어줄 테니까. 우리 아기랑 당신이랑 온실 안에서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야.」
로제의 부른 배를 보며 웃음 짓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본인이 한 말이 그저 충동적으로 던진 빈말이 아니라는 걸 입증이라도 할 것처럼, 그는 틈날 때마다 온실의 설계도를 그리고는 했다. 결국 그 온실은 지어지지 못한 채 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기야 온실뿐일까. 제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추억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사라지게 될 추억들이.
“그럼 실컷 구경해도 좋아. 아마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테니까. 하물며 왕실의 온실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비교될 수는 없을걸.”
헤이번이 농담처럼 가벼운 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온실 깊숙한 곳에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하녀가 없으니 차를 줄 수는 없고.”
“괜찮아요, 전하. 그냥…… 이렇게 온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은데요.”
로제가 그의 말에 가만히 웃고는 온실 안을 돌아보았다. 헤이번이 말한 대로 왕실의 온실도 이곳에 비교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온실 안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온갖 나무, 그리고 처음 보는 꽃들이 화사함을 뽐내고 있었다. 추운 계절이 아닌 봄, 혹은 여름에 접어들기 직전의 싱그러운 계절을 보여주듯 말이다.
추위로 인해 조금은 파리했던 로제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것을 확인한 헤이번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몸은 좀 어때?”
“……푹 쉰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비를 맞고 쓰러졌다가 깨어난 뒤, 하루를 꼬박 쉬었다. 공녀를 돌봐야 한다는 항변도 먹히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무조건 방에서 푹 쉬라는 게 그의 명령이었다.
그 바람에 로제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쉬어야 했다. 하다못해 플리타조차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씩씩하게 잘 있을 테니 푹 쉬라는 말만 베로니카를 통해 전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