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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95화 (9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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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눈을 감은 채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가 다시금 고개를 똑바로 했다. 길 건너편에 있던 가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디론가 몸을 피했을 것이다.

로제가 잠시 길 건너편을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야옹.

길고양이 한 마리만이 그녀의 앞을 지나가다가 한 번 울었을 뿐.

너는 왜 비를 피하지 않고, 거기에 있냐는 듯.

멀어져 가는 길고양이를 보던 로제의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리의 힘이 풀린 탓인지 자꾸만 몸이 휘청거렸다.

‘이별을…….’

로제는 무심코 손을 들어 제 뺨을 닦았다. 손등에 묻어난 것이 눈물인지, 혹은 빗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빗물에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어.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어쩌면 속으로 중얼거린 것인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것을 분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뭐가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로제가 피식 웃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비를 계속 맞은 터라 체온이 내려간 것인지, 그녀의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살고 싶어. 떠나고 싶지 않아.’

로제는 누군가를 향해 외치고 싶었다. 다리라도 붙들고 매달리라면 할 수 있었다. 발에 입을 맞추고 영혼이라도 바치라 한다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로제가 다시 비틀거리다가 벽을 짚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저를 붙들고 뱅그르르 돌리는 것처럼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귀가 먹먹해지면서 빗줄기 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차단된 공간 안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로제? 로제!”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챈 것은.

“무슨 비를 이렇게, 젠장! 몸이 뜨겁잖아! 로제, 눈을 좀 떠 봐. 정신 차려! 나야, 내가 보여? 내 목소리가 들려?”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비를 오래 맞은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로제는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되레 그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원래는 그의 앞에서 울어서는 안 될 테지만, 지금은 울어도 되었다.

비가 오니까.

……눈물 따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니까.

‘헤이번, 나 살고 싶어요.’

‘나 좀 살려줘요. 아이랑 당신 곁에서 살게 해 줘요.’

‘무서워. 정말 무서워서…….’

* * *

“로제, 대체 왜 이렇게 우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헤이번은 로제에게 우산을 씌워준 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이었다. 비가 제법 쏟아진단 생각에 마차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고, 바로 그때 비를 맞으며 비틀비틀 길을 걷고 있는 로제를 본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마차를 세운 뒤,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터라 우산조차 챙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헤이번을 보고 놀란 마부가 허둥지둥 우산을 들고 달려올 때까지, 그는 그저 로제를 부축한 채 정신을 차리라 외치기만 했다.

“로제?”

“…….”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우는 걸까. 아니, 본인이 울고 있다는 자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제 팔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달싹이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로제를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열이 높아 정신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저를 보는 로제의 눈이 흐릿한 것을 보면 말이다. 게다가 그녀가 제 팔을 잡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니까.

그는 제 팔을 꽉 붙잡고 있는 손을 보았다. 절박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저를 잡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어느 누구도 제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적 없었다.

오히려 제게 접근하고 집착하는 여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역하기만 했다. 선왕비를 비롯하여 제 눈에 들기 위하여 일부러 제 앞에서 비틀거린다거나 하는 식의 유치한 짓을 했던 이들 모두 그저 징그럽기만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달랐다. 일부러 저를 잡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설령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를 게 틀림없었다.

가슴속에서 북받쳐 올라오는 이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간다!”

헤이번은 우산을 마부에게 건네고는 로제를 안아 들었다. 열이 올라 뜨끈뜨끈한 몸이 그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그 와중에도 계속 눈물을 흘리는 건지 그녀의 얼굴이 맞닿은 어깨 근처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혹은 빗물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게 스며드는 물기가 단순한 빗물이 아니란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그래,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제 가슴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는 것도.

‘무엇이 너를 이토록 울게 만드는 걸까.’

헤이번은 로제를 안은 채 마차에 오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닿지 않는 바닥을 향해 계속 추락하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제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뭐라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아마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괜찮다고.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정함 때문일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나 아파요. 나 무서워요.’

어릴 적 부모를 잃어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며 살아본 적 없었다. 제 삶은 온전히 제 책임이라는 걸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웠다. 어린 고아에게는 그저 각박하기만 했던 세상이기에, 어리광은 사치일 뿐이었다.

그런 어리광을, 어릴 때도 부려보지 못했던 어리광을 부린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 다정한 온기에 기대어.

그런 제 모습에 당황한 것일까. 제게 괜찮다며 말해 주었던 이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어리광을 부려 귀찮다고 가버린 걸까.

‘미안……. 미안해요. 가지 말아요. 나 너무 무서운데, 말할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

로제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고, 희뿌연 천장이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축축 늘어져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뿌연 시야 속에서 나름대로 주변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나마 제 침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내가 어떻게 돌아온 거지?’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그것이었다. 치료사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서 그녀의 기억이 끊겼다.

‘길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로제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손끝에 뭔가가 닿았다.

플리타에게 만들어준 헝겊 인형이었다. 귀가 하나 없는, 미완성의 토끼 인형.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로제는 헝겊 인형을 손에 쥐고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 일어나 앉는 순간, 뭔가가 툭 떨어졌다. 젖은 물수건이었다.

“……어.”

로제는 제 이마를 만져 보았다. 방금 전까지 수건을 얹어 놓았던 듯 이마 위에 물기가 만져졌다.

‘열이 났던 걸까.’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로제의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아! 로제 일어났다!”

문을 열리고 그 사이로 노란 리본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들어왔다. 바로 플리타였다. 아침에 아이의 머리를 노란 리본으로 묶어주었던 게 멍한 와중에도 생각이 났다.

“로제, 이제 안 아파? 괜찮아?”

플리타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침대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 공녀님. 제가 어떻게…….”

“로제 비 맞아서 막 아팠어! 아빠가 로제 데리고 왔는걸!”

“……예?”

로제는 아이의 말을 듣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와 동시에 아이가 들어오느라 반쯤 열어두었던 문이 마저 열리더니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저, 전하!”

로제가 헤이번을 보고 깜짝 놀라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만류했다.

“됐어. 그냥 있어, 로제.”

“그, 그렇지만…….”

“간신히 정신 차린 사람을 또 쓰러지게 만들 수는 없지. 플리타, 너도 이쪽으로 오자. 로제가 아직 몸이 아프니까.”

“우웅, 다 나은 거 아니에요?”

“글쎄.”

헤이번은 플리타를 안아 들어 방 한쪽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힌 뒤,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로제가 피할 새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제 손을 댔다.

“열은 많이 내린 것 같군.”

“……!”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그 동그란 눈을 마주하고는 안도했다. 평소처럼 제 행동에 깜짝 놀라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이 비를 맞고 위태롭게 굴던 모습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비를 맞고 길을 가던 너를 발견했어. 마침 귀가하던 중이었고.”

“……아.”

그가 저를 데리고 왔다던 아이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로제가 멍한 표정으로 외마디 소리를 내뱉자 헤이번이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기억이 없나?”

“예, 그냥 길을 가던 것까지만.”

“열 때문에 기억이 없나 보군. 그 비를 전부 맞으며 돌아다녔으니…….”

헤이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로제는 어쩐지 자신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장난꾸러기가 된 것 같아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로제가 민망함에 볼을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로제 비 맞고 그러면 안 돼! 감기 걸려!”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며 그 모습을 보던 플리타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야무지게 외쳤다. 헤이번이 팔짱을 낀 채 아이를 돌아봤다가 다시금 로제를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는군.”

“……면목 없습니다, 전하. 죄송해요. 공녀님께도요.”

로제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나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이별’이 다시금 떠오른 탓이었다. 물론 한바탕 앓고 난 뒤라 머릿속이 멍해서 그런지 아까처럼 격한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그를, 그리고 아이를 보았다. 소나기가 그친 것인지 햇살이 아이의 등 뒤에서 비추고 있었다.

톡.

로제는 창틀에 떨어진 빗물을 보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너무나 흐릿해서 눈 한 번 깜빡이자 사라져버린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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