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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가 한 박자 늦게 대답한 뒤, 플리타의 옆쪽에 앉았다. 헤이번과는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보는 셈이 되었다.
냠냠. 플리타가 케이크를 먹고 주스를 마시는 소리만이 테이블 위에 들렸다. 헤이번이나 로제 두 사람 모두 찻잔을 들고만 있을 뿐, 입에 대고 있지 않아서였다.
“…….”
헤이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로제를 응시하다가 미간을 모았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건 조금 전이었다. 플리타를 챙기다 말고 뭔가를 떠올린 건지 그녀의 시선이 애틋해졌다. 그리고 지금껏 계속 저렇게 가라앉아 있다.
‘뭘 생각하고 있지?’
그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꺼낼 질문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 이후, 조금 묘하게 변한 그녀와 제 관계 때문에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사실 그렇게 의식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가 그냥 한 말이고, 로제 역시 아이에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걸 아는데도…….
“크흠.”
헤이번은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라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던 플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을 꺼냈다.
“아바 어구울 빠, 콜록!”
“공녀님, 말씀을 하시려면 음식을 꼭꼭 씹어 다 드신 뒤에 하셔야죠.”
로제가 황급히 플리타에게 주스를 건넸다. 플리타가 목에 쿠키가 걸려 콜록거리다가 주스를 마시고는 조금 더 또렷한 발음으로 외쳤다.
“아빠 얼굴 빨개졌어요!”
“아니, 이건…….”
“아빠, 로제 좋아하는 거 맞죠? 나 다 봤는데! 아빠, 방금 로제 쳐다보고 있었어! 로제만 보면 얼굴 빨개져!”
플리타가 히힛, 웃으며 신나서 말을 이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아이의 천진한 장난 섞인 말이었다.
그런 플리타의 말에 당혹스러워진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조금은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 역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 로제도 얼굴 빨개졌다!”
플리타가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금 외쳤다. 로제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공녀님.”
“아닌데? 빨개졌잖아?”
“……그게.”
“플리타.”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헤이번이 마른세수를 한 뒤, 아이를 불렀다. 플리타가 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비의 눈치를 살피느라 일찌감치 애어른이 되었던 아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저 장난을 치고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천진난만한 아이가 있을 뿐.
“……이것도 맛있어 보이는구나. 먹으렴.”
그런 플리타에게 장난을 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헤이번은 본래 하려던 말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제 앞쪽에 있는 머랭 파이 접시를 아이에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머랭 파이에 호기심을 보이는 듯싶더니 이내 그것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게다가 어디선가 잠을 자고 있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강아지까지 다가와 아이에게 저도 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하양아, 넌 이거 먹으면 안 돼.”
머랭 파이 접시를 지키랴, 강아지랑 놀아주랴, 정신없이 바쁜 아이를 보던 헤이번이 그 틈을 타서 로제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전에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던데.”
“예? 아, 저기 코피가 났던 건…….”
또 코피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 로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헤이번은 손사래를 친 뒤, 다른 말을 꺼냈다.
“아니. 좀 전에 플리타를 보는 네 표정이 우울해 보여서.”
“…….”
그의 말에 로제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불쑥 질문을 건넸다.
“혹시…… 가족을 생각한 건가?”
“……예?”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에 로제가 파르르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혹시 제 질문이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나 싶어 허둥대며 말을 이었다.
“전에 얘기한 적 있었잖아. 아이가 있었다고. ……남편도.”
“…….”
“그래서 혹시 플리타를 보면서, 네 가족을 생각했나 해서. 미안, 사과하지. 내가 괜한 오지랖을…….”
“예, 맞아요.”
헤이번이 말을 잇다가 손사래를 치며 사과하는데, 로제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플리타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볼 수 없을 거라서요.”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 정도가 너무나 짙어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헤이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로제가 그를 돌아보고는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도 안색이 좋지는 않으신 듯해요. 피곤하신가요?”
“아, 뭐……. 별로.”
헤이번은 대화의 주제가 바뀐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생각하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저은 뒤, 조금은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요즘 두통이 자주 있어서 말이지. 잠을 설칠 때도 많아졌고.”
“어디, 몸이 안 좋아서 그러신 건 아닌가요?”
로제는 그의 말에 근심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헤이번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니야. 별것도 아닌데 내가 괜한 말을 했군.”
“저한테는 주치의에게 진료를 보라, 그리 말씀하시더니 정작 전하께서는 건강에 너무 무심하신 것 아닌가요?”
로제의 목소리가 조금 엄해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헤이번이 다시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로제가 조금 멋쩍어 머뭇머뭇 덧붙여 말했다.
“……주치의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헤이번은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벼운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같이 주치의한테 찾아가 진료를 보면 되겠군. 안 그래, 로제? 뭐, 지금이라도 당장 가 볼까?”
“……예?”
로제가 그의 농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이번이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실없는 말을 내뱉었단 사실을 깨닫고 손사래를 쳤다.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미쳤구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저답지 않은 농담을 하다니. 누가 봤다면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으응?”
플리타는 강아지와 신나게 놀다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얼굴이 새빨간 두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배시시 웃은 아이가 강아지를 품에 안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꼭 가족 같아. 그치, 하양아? 아빠랑 나랑, ……그리고 엄마랑.”
그것은 아이의 바람이기도 했다. 로제가 엄마였으면, 하는.
* * *
「코피가 자주 난다고요? 쯧쯧. 이봐요, 아가씨. 아무래도 이제 이별을 준비해야 할 듯싶소.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한테 알리고…….」
로제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외벽을 짚고 몸을 기댔다. 치료사는 더 이상 약을 지어줄 수 없다고 했다. 아니, 이젠 약이 쓸모가 없다며 약을 지어주지 않겠다고 했다.
잔혹한 말이지만, 치료사 나름대로는 양심적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준비를 하라고?’
그녀는 벽에 옆으로 기대어 서 있다가 다시 등을 기댔다. 텅 빈 시선이 건물 위쪽 어딘가를 배회하다가 툭, 떨어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별을 준비해야 한단다.
“……이별.”
로제는 꾹 달라붙어 열리지 않으려는 입을 억지로 열어 그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두 손을 움켜쥔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턱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소리 없는 울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끝을 알고 있으면서 그와 아이를 보러 온 게 아니었던가.
아니, 끝이 다가올 것이기에 무모하게 길을 떠나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시골 마을 안에 틀어박힌 채 평생 나오지 않았을 텐데.
그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하지만 예정된 죽음 앞에서 로제는 이기심을 앞세웠다. 죽기 전에 그들을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변명거리를 붙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 끝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더러 어떻게 그들과 이별하라고. 어떻게 헤어지라고.’
“어떻게…… 떠나라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코트 위쪽으로 드러난 새하얀 목이 추워 보였다. 목도리라도 했더라면 나았을 테지만, 그녀는 제 몸 챙기는 것만큼은 언제나 서툴렀다.
“어떻게 아이를 두고, ……그를 남겨두고.”
로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허탈한 어조로 중얼댔다. 그저 얼굴만 보려 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삶 속에서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보고 싶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아이가 어엿한 꼬마 숙녀가 되고, 아가씨가 되고, ……저처럼, 아니, 저처럼 모자란 엄마가 아닌 완벽한 엄마가 되는 걸 그저 뒤편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또한 그를 계속 보고 싶었다. 어쩌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남자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의 세월 속에,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되어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제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제게 허락된 운명이 잔인할 정도로 선명히 선을 그었기에.
이쪽. 그리고 저쪽.
로제는 길 건너편을 보았다. 마침 젊은 부모와 어린아이가 웃으며 길을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귀족도 아니고 부유하지도 않은.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그들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이었다.
로제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뺨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엄마, 비가 와!”
동시에 아이가 제 엄마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소나기가…….”
누군가가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투덜대며 로제의 앞을 지나쳤다.
쏴아아.
로제는 금세 겉옷이 비에 젖어 묵직해진 걸 느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내리는 비에 그녀의 얼굴이 젖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