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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93화 (9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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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로제, 코에서 피가 또 나!”

플리타가 로제가 읽어주는 동화책 내용에 맞춰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로제는 동화책 다음 장을 읽으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제 코 아래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아…….”

손등에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로제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제 손등과 코를 닦았다. 하지만 한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코피는 쉽게 멎으려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공녀님. 잠시만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를 눌러 막고는 서둘러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코를 막고 있던 손수건을 떼자마자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로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제 남은 목숨이 뚝뚝 떨어져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두려움이 엄습한 것이다.

“로제, 괜찮아? 코피 많이 나?”

등 뒤에서 플리타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제는 코와 손등에 묻은 피를 닦은 뒤, 애써 밝은 투로 입을 열었다.

“많이 안 나요. 괜찮아요, 공녀님.”

“어디 봐! 내가 볼래!”

플리타가 욕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더니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로제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직 코피가 멎지 않았다.

‘제발.’

그녀는 차가운 물로 코를 닦고, 콧등 위쪽을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까스로 코피가 멎었다. 로제는 또다시 피로 얼룩진 손을 깨끗이 씻고는 그제야 환한 미소와 함께 아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플리타가 막 울기 직전이었는지 울망울망한 눈으로 로제를 올려다보았다.

“보세요, 공녀님. 저 괜찮죠?”

“흐잉…….”

플리타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로제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어디 한 군데 놓칠까 봐 눈에 힘까지 준 채 그녀를 보는 아이의 시선에 로제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코피 안 나죠?”

“……으응.”

플리타가 확인을 끝내고는 로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아이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아이는 곧바로 그녀의 손수건을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로제가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손수건은 세탁하면 깨끗해져요.”

“그치만…… 왜 자꾸 코피가 나?”

플리타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더니 요 며칠 입 속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아이의 연녹색 눈에 서린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너를 두렵게 만들었구나, 아가.’

로제는 아이가 꺼낸 물음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콧등을 찡그렸다.

“날씨가 제법 추워졌죠, 공녀님?”

“응? 으응.”

“날씨가 추워지면서 눈도 뻑뻑해지고, 콧속도 마를 때가 있고요.”

“응. 그래서 로제가 밤에 자기 전에 따뜻한 물수건도 눈에 올려줬잖아. 건조해지면 안 된다고.”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이해했다며 은근히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콧속이 건조해지면 코피가 잘 나요.”

“……?”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바로 로제에게 물었다.

“정말?”

“예. 건조해지면 이 안쪽 점막이 약해지거든요.”

어린아이가 듣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나름대로 열심히 이해하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로제도 따뜻한 물수건 대고 있어! 내가 해 줄게!”

“이따가요, 지금 말고.”

“하지만!”

플리타가 마음이 급한 듯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전하가 오실 거잖아요. 오늘 같이 간식 드시기로 했는데.”

“아, 맞다.”

아이는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발을 구르던 걸 멈췄다. 바로 그때였다. 욕실 밖, 정확히는 침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건.

-플리타? 로제? 아무도 없나?

뒤이어 헤이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와 플리타가 서로 눈을 마주하고는 냉큼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아빠!”

플리타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헤이번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고는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욕실에 있었던 건……. 어디 다쳤나?”

“예?”

로제는 헤이번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다 말고 그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이번이 그녀의 소매 끝을 가리키며 미간을 좁혔다.

“소매에 피 얼룩이 있는 것 같아서.”

“아, 이건…….”

“아빠, 로제 코피 났어요!”

플리타가 헤이번의 말에 냉큼 큰 소리로 외쳤다. 로제는 대답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반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코피가 났나?”

“그냥, 조금요. 별일 아닙니다, 전하.”

“아니에요, 아빠! 어제도 났고, 그, 그…….”

로제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돌리려 했지만, 이번에도 플리타가 끼어들었다. 아이는 그의 목에 제 팔을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저께’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저께?”

“네! 그저께요! 그저께도 코피 났어요! 매일 코피 나요! 콧속이, 뭐더라? 응, 건조해서 그렇대요!”

아이는 조금 전 로제에게 들었던 얘기를 헤이번에게 해 주었다. 하지만 헤이번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건조해도 그렇지. 코피가 매일 나는 건…….”

“괜찮아요, 전하. 건조하면 그럴 수 있는걸요.”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는 황급히 눈짓으로 플리타를 가리켰다. 아이가 헤이번과 로제를 번갈아 보며 입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야 로제의 눈짓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아. 그럴 수 있지.”

“진짜요?”

“그래. 그나저나 뭘 하고 있었지?”

헤이번은 아이를 안심시키고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플리타가 그의 질문을 받고는 기쁜 마음에 재잘재잘 대답했다.

“로제가 동화책 읽어주고요. 저는 인형으로 연극을 했어요. 이렇게, 얘가 공주님이고요. 얘는 용감한 기사고…….”

플리타가 조금 전까지 놀던 자리로 몸을 기울였다. 헤이번은 그런 플리타를 자리에 앉혀준 뒤, 아이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로제에게 말을 건넸다.

“주치의에게 진료를 보도록 해.”

“……아니요, 괜찮아요.”

“무조건 괜찮다고 하지 말고.”

“정말이에요, 전하. 저…….”

로제가 거듭 그의 말에 괜찮다고 하려는데, 헤이번이 그녀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혹시 정기적으로 나가서 약을 받아오는 게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

로제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란 말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외출했을 때, 헤이번이 제 약 봉투를 본 일도 있었고.

게다가 유모가 되어 외출이 조금 더 자유로워진 이후, 약을 받기 위하여 저택을 몇 번 나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몸이 좀, 약한 편이라서요.”

그나마 꺼낸 핑계는 그것이었다. 몸이 약하다는 것. 그 외에는 로제가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헤이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로제를 보았다. 마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난번, 플리타가 천진난만하게 꺼낸 ‘좋아하냐’는 물음 이후에 종종 이렇듯 두 사람의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치의에게 몸 상태를 한번 보이도록 해. 수도 내의 웬만한 치료사들보다 그의 실력이 뛰어나니까.”

“……예. 아! 디저트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전하.”

로제가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때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디저트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로니카.”

“로, 아, 유모님.”

디저트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온 하녀는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로제를 보고는 장난스럽게 ‘유모님’이라 불렀다. 로제가 그런 베로니카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베로니카.”

“유모님을 유모님이라 부르는……. 어머!”

베로니카가 웃으며 말을 잇다가 침실 안쪽에 있는 헤이번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고 로제에게 트롤리를 넘겨주었다.

“난 여기서 그냥 갈게요, 로제.”

“예?”

“전하께서 계시니까, 좀…….”

베로니카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이 보는 앞에 트롤리를 가지고 들어가는 게 그녀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일인 듯싶었다.

“알았어요. 편한 대로 해요.”

“고마워요!”

베로니카는 로제의 허락에 냉큼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달아나다시피 가버렸다. 로제가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는 트롤리를 끌고 침실로 돌아왔다.

“베로니카는?”

플리타가 간식을 먹으려고 자그마한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매일 디저트를 가지고 오는 하녀가 오늘은 왜 침실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궁금한 표정이었다. 로제는 그냥 웃고는 테이블 위에 디저트를 차려놓았다.

헤이번이 앞에 있는데, 그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우와! 딸기 케이크!”

다행히 아이의 관심은 제 앞에 놓인 디저트로 향했다. 플리타는 입맛을 다시며 포크를 집었다. 로제가 도둑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못 먹었던 것까지 다 먹으려는 건지 요즘 들어 아이의 식욕이 더욱 왕성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로제는 플리타의 앞에 딸기주스를 따라준 뒤,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1년 뒤에는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1년 뒤에도 아이의 곁에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지만. 아니, 당장 반년 뒤에 아이의 곁에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로제는 울컥거리는 속을 억누른 뒤,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따끈하게 데운 차를 따라 헤이번의 앞에 놓았다.

“로제, 너도 들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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