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92화 (92/134)

92

“로제가 아빠 좋아해서 같은 쿠키 고른, 합! ……이거, 비밀이랬는데.”

플리타는 포크까지 떨어뜨리고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봤자 이미 할 말은 다 해버린 셈이었지만 말이다.

“…….”

“…….”

아이가 터뜨린 폭탄의 위력은 막강했다. 헤이번과 로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시선을 돌린 건 헤이번이었다.

“흐흠, 흠!”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얼굴에 열이 오른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황한 로제가 오해라며 해명하려는 순간, 플리타가 다시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빠도 로제 좋아해요?”

“흠, ……뭐?”

헤이번이 재차 헛기침을 하다가 느닷없이 들려온 딸의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플리타가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로제도 아빠랑 비슷하게 막 그랬는데. 손으로 부채질하고. 얼굴 빨갛게 되고.”

“…….”

“근데 그게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아, 또 말했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로제의 눈치를 살폈다. 로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미간을 찡그렸다.

제 실수였다. 어린아이에게 ‘비밀’이라 당부했어도 그게 지켜지기 힘들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플리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런 것으로 아이를 야단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제 경솔했던 행동을 탓할 뿐.

“……죄송합니다, 전하. 저, 그게 사실은.”

그저 농담이었다고,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고, 그렇게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헤이번의 얼굴을 본 로제의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빨갛게 될 수 없을 정도로 벌겋게 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

“실례하지.”

로제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금 말을 꺼내려는 순간, 헤이번이 급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그대로 달아나듯 침실을 나가버렸다.

“어?”

플리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로제? 아빠 화났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로제가 침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시선을 거둔 뒤,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저 때문에 아빠가 화난 줄 아는 아이를 달래다가 다시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니야. 그럴 리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기대를 애써 접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험험.」

어색함을 달래느라 괜한 헛기침을 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괜히 발아래의 땅을 툭툭 걷어차던 모습도.

그리고,

「……좋아해요, 로제. 아니, 사랑해.」

그렇게 고백을 전했던 예전 그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 전 급히 달아난 남자와 겹쳐 보였다.

제 착각일 테지만.

제 헛된 꿈이 빚어낸 오해일 테지만.

* * *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자벨라는 머리 단장을 끝낸 뒤에도 한참 동안 거울 속 제 모습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시녀장이 두 손을 모은 채 시립하고 있다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다른 시녀를 불러올까요?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그 여자 말이야. 대공 저의 하녀!”

이자벨라가 시녀장의 말에 답답해 하며 화장대에 있던 향수병을 내던졌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병이 깨지면서 짙은 향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시녀장은 지독한 향기 속에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왕비전하. 제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됐어. 창문이나 열어. 냄새가 지독하구나.”

신경질을 한 번 부리고 나니 화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이자벨라는 조금은 누그러든 투로 말했다.

하지만 시녀장을 비롯해 침실 안에 있는 시녀들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온갖 짜증을 퍼붓는 이가 제 주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녀의 명에 따라 한 시녀가 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시녀가 들어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선왕비전하, 더클렌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모시거라.”

이자벨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이어 그녀의 아비인, 테오르반 더클렌 공작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방 안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침실 안에 진동하는 독한 향수 냄새 때문이었다.

‘또,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린 게로군.’

공작은 방 안의 상황을 보고 금세 어찌 된 일인지 파악했다. 깨진 향수병과 바짝 긴장해 있는 시녀들을 보아하니 제 딸이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저 성질은…….’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가 이자벨라를 향해 예를 표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아버지.”

이자벨라가 시녀장만을 남기고 모두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 급한 모습에 공작이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굳이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리에 앉아 조금은 편한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대공이 왕궁에 다녀갔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헤이번이 왕궁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벌써 더클렌 공작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만큼 공작이 왕궁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이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으리란 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벨라에게 물어본 건 그저 형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혹은 어설프게 행동하여 헤이번에게 빌미를 준 저를 탓하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꺼낸 것이거나.

이자벨라가 수치심을 지우지 못한 채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더니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녀에게 팔찌를 주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플리타의 유모가 했던 말들, 그리고 제 눈으로도 보았던 헤이번과 하녀 사이의 묘한 분위기.

그리고 그에 자극을 받아 유모를 부추겼던…….

“쯧,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구나.”

공작은 이자벨라의 이야기를 듣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라 제 낯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아무리 헤이번에게 집착을 해도 그렇지, 대체 어쩌자고…….

“고작 하녀 하나를 내치자고 그런 일을 꾸몄단 말이냐? 선왕비인 네가?”

“그럼 어떻게 해요! 자꾸만 눈에 거슬리는데. 게다가 헤이번이 그 하녀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고요.”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천한 하녀를 치워버려야 한다고.

“아버지.”

이자벨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다가 시선을 들어 공작을 쳐다보았다.

“도와주세요. 그 하녀를 헤이번의 눈앞에서 치워버려야겠어요.”

“네 말대로 대공이 그 여자를 마음속에 들여놓았다면 가만히 있겠느냐? 섣불리 움직였다가 괜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고작 하녀 하나를 치우려다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는 법이다. 더구나 헤이번 괸터스, 그자라면 더욱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아비의 태도에 화가 난 듯 이자벨라가 짜증스러운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시골 촌뜨기 같은 게 올라와서 헤이번한테 꼬리를 치잖아요! 가뜩이나 플리타, 그 애랑 닮아서 기분 나쁜데.”

“……뭐?”

공작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시녀장도 그 옆에서 차 시중을 들려다가 덩달아 몸을 움츠렸다. 그만큼 공작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살벌해진 탓이었다.

“누가, 그 애와 닮았다고?”

“그 여자 말이에요. 지금껏 말한 그 하녀요! 플리타랑 눈 색깔도 비슷하고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도 닮았…….”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던 이자벨라 역시 뭔가를 떠올렸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설마…… 아니겠지요?”

“…….”

“아버지,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이자벨라가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다가 두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 바람에 길게 기른 손톱이 부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만약 지금 제 생각대로 그 하녀가…….

“……‘그 여자’면 어떡해요? 플리타의 생모 말이에요!”

“목소리를 낮춰라, 이자벨라.”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인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흠칫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신이 사나워진 공작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자벨라가 다시 멈춰 서서는 입을 열었다.

“그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그 여자?”

“아이의 생모 말이에요.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면 어디로 갔는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자벨라는 부러진 손톱 끝을 깨물다가 고개를 마구 흔들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 로제, 그 하녀가 아이의 생모인지부터 확인해 주세요. 그게 우선인 것 같아요.”

“설마, 그렇겠느냐?”

공작이 과하게 초조해하는 딸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공작의 표정도 딱히 편안하지는 않았다. 노귀족의 머릿속 역시 그 ‘가정’이 현실일 경우를 대비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공녀를 낳은 생모가 정말 하녀로 위장하여 대공 저에 있는 것이라면. 아이의 곁에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사실이 드러날 경우, 헤이번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쁠 게 없잖아요.”

“……후우, 그건 그렇지.”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자벨라가 아이와 그 생모를 한꺼번에 죽였어야 했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워런 포어킨 후작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이의 생모만이라도 죽였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천한 것을 죽이느라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늘.’

그는 재차 혀를 찬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계속 방 안을 돌아다니던 이자벨라가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서 조사해 보마.”

“알아내는 대로 연락해 주셔야 해요, 아버지.”

“물론이다.”

공작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