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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이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나? 꼭 그래야 한다면 사과하라고 하고.”
“……아니요. 괜찮습니다.”
로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사과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유모의 사과에 진심이 담겼으리란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런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왜 그렇게 악의적인 짓을 꾸민 것인지.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기에 그랬는지. 그런 걸 묻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명을 벗어 플리타와 헤이번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것 말고는 제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플리타에게 가 보도록 해. 아이가 너를 많이 걱정하고 있으니.”
“……그, 그래도 되나요?”
지쳤던 녹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고작 아이에게 가 보라는 말 한마디에 말이다. 그는 피식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백이 증명되었으니 근신하라 했던 명령도 마땅히 거두어야지. 가 봐, 로제.”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로제는 언제 지쳤던가 싶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를 향해 미안한 시선을 던지는 고용인들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저 아이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헤이번은 쏜살같이 밖으로 나간 로제의 뒷모습을 좇듯 잠시 출입문 쪽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시 유모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디찼다.
“나머지는 야닉,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예, 전하.”
유모는 해고될 터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란 의미는 아니었다. 괸터스의 이름 아래에, 그녀는 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 말이다.
헤이번은 조금 전 로제가 나간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멈춰 서더니 하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모는 다시 채용하지 않아도 되네, 하녀장.”
“……그럼.”
“로제를 유모로 승격시키도록 하지.”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꺼낸 말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일개 하녀였던 이가 공녀의 유모가 된 것이다.
하녀장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헤이번은 하녀장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어쩐지 그의 발걸음이 조급해 보였다.
* * *
로제는 플리타의 침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고작 며칠이었을 뿐인데, 오랫동안 아이를 보지 못한 것처럼 괜히 가슴이 술렁거리고 먹먹해졌다.
그녀는 거듭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노크 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문 바로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다다다, 달려온 발소리에 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로제!”
아이가 문을 활짝 열고 나오더니 그대로 두 팔을 뻗어 로제를 끌어안았다. 키가 작아 로제의 다리를 끌어안은 플리타는 그녀를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두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흐아앙, 로제!”
그 상태에서 플리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와 더불어 강아지는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로제와 플리타의 주변을 맴돌며 “멍멍!” 짖어대기 바빴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로제가 너무나 그리워했던 바로 그 풍경이기도 했다.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너무나 소중하여 결코 놓을 수 없을.
“공녀님, 이제 그만 우세요. 저 왔잖아요.”
“흐허엉, 어엉, 이제 안 갈 거야? 안 갈 거지?”
플리타가 눈물뿐만 아니라 콧물까지 훌쩍이며 고개를 뒤로 젖혀 로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접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예, 이제 안 가요. 공녀님 곁에 있을 거예요.”
로제는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로제의 손가락을 꼭 쥐고는 재차 물었다.
“정말? 계속 나랑 있을 거야?”
“……예.”
로제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맞았다. 제게 허락된 시간은 짧고, 즉 그것은 아이와의 이별을 뜻하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범벅이 된 아이를 보며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헤에…….”
그 약속에 안심한 것일까. 울음을 그친 플리타가 퉁퉁 부은 눈을 반쯤 접어 웃더니 그녀의 품에 안겼다. 로제가 그런 플리타를 감싸 안고는 눈을 감았다.
“…….”
그리고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헤이번이 멈춰 서 있었다. 로제의 뒤를 따라 플리타의 침실로 온 길이었다.
강아지가 냉큼 제 어린 주인의 아비에게 친근하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헤이번은 몸을 숙여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다시 허리를 펴고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침실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에 쪼그려 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움켜쥔 주먹을 제 가슴팍에 대고 꽉 눌렀다.
가슴속 어딘가가 이상했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뭉클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느낌마저 들었다.
‘기억해!’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자신의, 아니, 자신과 닮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녀를 잊지 마!’
결코 저와 무관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타인의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으윽…….”
헤이번은 갑자기 두통이 일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로제가 고개를 돌렸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전하? 어디 편찮으세요?”
“아빠, 아파요?”
플리타가 덩달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헤이번이 로제와 플리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굵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찾아왔던 두통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저 얼얼한 느낌이 흔적처럼 남았을 뿐이다.
“잠시 머리가 아팠을 뿐이야. 괜찮아.”
“같이 들어가요, 아빠. 제 침대에 누워서 쉬세요.”
플리타는 헤이번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덥지 않은 듯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아이의 침실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그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헤이번이 아이의 손을 잡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로제 역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아빠, 여기 누우세요.”
플리타는 그의 손을 놓고는 침대로 가더니 이불을 걷었다. 헤이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플리타. 안 누워도 돼.”
“그래도 누우세요. 아플 때는 누워서 푹 쉬는 거랬어요. 그치, 로제?”
플리타가 헤이번에게 말을 하다가 제 편을 들어 달라는 듯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피식 웃은 뒤, 소파를 가리켰다.
“침대 대신 저 소파에 앉아서 쉬면 안 되겠니?”
“우웅…….”
아이가 고민하는 듯 입을 쑥 내민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시는 편이 낫겠어요. 아! 마침 공녀님 간식 시간도 다 되어갈 텐데……. 간식 아직 안 드셨죠, 공녀님?”
“어? 으응, 응!”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며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로제가 그 모습에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헤이번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렇게 오셨으니 공녀님과 함께 디저트를 드시며 잠시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전하.”
“……그래. 그렇게 하지.”
헤이번이 로제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썼던 터라 마음이 많이 다치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 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곁으로 돌아온 로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저와 아이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 주기 위해 디저트를 같이 먹자고 권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하여간 신기한 여자였다.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 * *
“와아, 내가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랑 우유 푸딩이야!”
플리타는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것처럼 입을 벌렸다. 다른 때보다 더 간식을 반기는 모습에 로제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제가 근신 명령을 받은 이후로 플리타는 마음고생을 하느라 식사뿐만 아니라 간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 사정을 모르는 로제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의아한 마음을 접고 아이가 잘 먹을 수 있도록 포크를 손에 쥐여 주었다.
“어서 드세요, 공녀님.”
“응! 아, 아빠도 드세요.”
아이는 냉큼 케이크를 먹으려다가 생각난 듯 맞은편에 앉은 헤이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너도 어서 먹어라, 플리타. ……같이 먹지.”
헤이번의 시선이 로제에게 향했다. 플리타가 냠, 하고 케이크를 먹더니 발을 앞뒤로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도 먹어. 정말 맛있어!”
“아니요, 저는…….”
“셋이 있으면서 하나만 빼놓고 디저트를 즐기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헤이번은 로제가 사양하려는 걸 딱 자르고는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쿠키를 하나 집었다.
“어? 아빠랑 같은 거 집었다!”
플리타가 로제의 손에 들린 쿠키를 보더니 괜히 신이 나서 크게 외쳤다. 어린아이에게는 사소한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법이었다. 더구나 같은 쿠키를 고른 두 사람이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였다. 아이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신나 하다가 말을 뱉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