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자벨라는 눈을 찡그리며 제 나름대로 추측했다. 그러고는 다시 기가 막혀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고작 하녀를 구하기 위해 그것을 빌미 삼아 공작 부인을 협박했다고?’
조카가 고모를 협박한 일 자체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제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 역시 자신을 위하여 남편을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한낱 하녀 따위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아아, ……그렇습니까, 고모님? 선왕비께서는 어떠신지요. 기억에 조금 오류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오직 헤이번만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이자벨라를 향해 질문했다. 이자벨라는 두 손을 꽉 말아쥔 채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이에 찢기면서 상처가 났는지 금세 피가 입 안에 고였다. 그 비릿한 피를 삼키느라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네요. 이제 기억이 제대로 났어요. 제가…… 잠시 잘못 기억을 했었네요. 로제의 시중이 마음에 들었고, 더구나 당신의 아이를 구한 공이 있으니 상을 주고 싶은데 마땅한 것이 없어서…….”
이자벨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헤이번은 푸른 눈으로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그녀가 짓씹듯 말을 뱉어냈다.
“그래서 제가 선물했거든요. 확실히 기억나네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왕비께서 이렇게 직접 확인해 주셨으니 더 이상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없겠군요.”
헤이번은 제 용무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선왕비와 공작 부인, 두 사람 모두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두 사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이자벨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자벨라가 이를 악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그걸 확인하려고 온 거예요? 그게 전부라고요?”
“다른 이유가 더 있어야 합니까?”
“왕궁에 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잖아요. 제가 그렇게 방문해 달라고 할 때도…….”
“형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에 드나들 이유가 없지요.”
헤이번은 이자벨라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의 푸른 시선이 너무나 차가웠다. 이자벨라의 눈가에 가늘게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뭐라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곧, 다시 뵙게 되겠죠. 아니, ……그때는 이곳이 당신의 ‘집’이 될 거예요.”
그녀의 장담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진심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또한 헤이번은 굳이 그런 시선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는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이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흠칫했다.
“고모님.”
“어, 그래? 왜 불렀니?”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괸터스의 핏줄을 굳이 내칠 마음은 없습니다.”
자신의 말에 공작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조금 도는 것을 본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섰다.
물론 그렇다 하여 페란테 소공작이 저지른 일을 전부 해결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이야 그렇게 착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숨만큼은 보호해 주겠노라 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선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정신을 차릴지 말지는 저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헤이번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응접실을 나섰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제 아이와, ……그녀를 떠올리며.
* * *
“저, 저는 몰랐습니다, 전하! 정말 몰랐어요! 선왕비전하께서 그 귀한 팔찌를 로제에게 선물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유모는 새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유모의 눈은 그와 별개로 바쁘게 움직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선왕비전하께서 나한테 이러실 리가 없는데. 그냥…… 그 팔찌만 찾아내서 살짝 훔쳤단 식으로 말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유모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또한 억울하여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을 할 일이었다. 그저 선왕비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저 혼자 이 모든 것에 대한 덤터기를 뒤집어쓰게 생기지 않았나.
“하…… 하지만 로제가 제 장신구와 돈을 훔쳐간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하! 본래 그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지, 선왕비전하의 팔찌를 발견했던 건 그저 우연…….”
“우연이라.”
헤이번이 유모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유모가 다시금 몸을 움찔거리더니 변명을 늘어놓았다.
“예, 전하. 그저 우연이었습니다. 로제의 손버릇이 나쁘니 혹시 제 물건 외에도 다른 이의 것을 훔치지 않았나 싶어,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선왕비의 팔찌에 대한 건 그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유모가 착각한 것이라 결론을 내리면 되겠군.”
“예에, 그렇습니다!”
유모는 제 말을 중간에 가로챈 헤이번에게 불쾌해하기는커녕 되레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각이었다. 그녀는 저를 대신하여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준 헤이번에게 고마움까지 느꼈다.
‘그럼 그 팔찌 일은 그렇게 정리하고…….’
본래 목적대로 로제, 저 계집애만 내쫓으면 다 해결될 터였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한결 놓여 유모의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헤이번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꺼낸 것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유모의 물건을 훔쳐간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것뿐이겠어.”
“그, 그거야 이미…….”
이미 로제라고 확정한 게 아니었던가.
유모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뒷말을 삼켰다.
헤이번이 유모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집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집사가 그의 옆에 서 있다가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저택 내 모든 고용인들의 동선을 파악하였네. 시간대별로 상세하게 파악하여 도식화하였더니, 일부 고용인들 사이에 접점이 생기더군.”
집사의 말을 들은 고용인들이 웅성대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얼마 전 각각 불러서 개인적으로 세세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듯싶더니 이걸 알아보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용인들 중 대다수의 반응은 거기서 그쳤다.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반면, 유모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녀는 뭔가를 감지한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집사가 유모를 돌아보았다.
“미겔 부인.”
“……예? 예에?”
유모가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집사는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날, 부인의 장신구와 돈이 없어졌다고 한 날 오전에 부인이 로제 양의 방 근처에 다녀간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럿 있더군요.”
“그, 그건…….”
“왜 로제 양의 방 근처에 갔던 거요?”
집사는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 질문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고용인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설마 유모님이 누명을 씌운 거야?
누군가가 옆에 있는 다른 이에게 작게 묻는 소리를 들은 유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그저, 로제한테 시킬 일이 있어서 갔던 거예요. 그런데 로제가 방에 없어서…….”
“로제 양은 그 시간에 공녀님의 침실에 있었소. 물론 그에 앞서 미겔 부인이 자리를 비우면서 공녀님의 시중을 들고 있으라 명했고요. 그에 대해서는 공녀님의 말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녀장도 확인했으니 반박할 수 없을 터.”
“……지, 집사님. 저는.”
유모는 파리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터라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뭐라 변명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로제의 방으로 가는 저를 봤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무도 없었는데.’
“사각지대란 게 존재하지.”
바로 그때, 잠시 침묵하던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마치 유모가 한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유모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며 그를 보았다.
“본인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누군가는 볼 수 있거든.”
더구나 이곳, 대공 저처럼 넓으면서도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공간이라면 그런 사각지대는 더욱 많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헤이번이 그 점을 지적하자 유모가 더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목격한 사람은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못했을 거다. 공녀를 돌보는 유모가 다른 하녀에게 도둑 누명을 뒤집어씌우려고 그 방을 몰래 찾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테니까.”
맙소사.
누군가가 기가 막힌 듯 탄식했다. 동시에 유모를 보던 고용인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누군가는 경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입속말로 욕을 내뱉었고, 다른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털썩.
유모는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그대로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색이 되어버린 그녀의 앞에 헤이번이 다가갔다.
“저, 전하.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그의 싸늘한 시선 앞에 유모가 두 손을 모으며 용서를 빌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짓으로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것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녀장이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 역시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힐끔거리며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로제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유모를 보고만 있는, 그 가냘픈 여자를.
“내게 사과를 할 일이 아니지 않나.”
그 순간, 헤이번이 유모를 향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유모는 덜덜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내가 아닌, 로제에게.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뒤집어쓸 뻔했던 이에게.”
“……저, 전하.”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어차피 진심도 아닐 테니 말이야. 애당초 제 잘못을 뉘우칠 만큼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꾸미지도 않았겠지. 안 그런가, 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