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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헤이번이 냉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왜 제가 가지고 있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 혹시 제가 대공 저에 갔을 때 거기에 두고 온 건가요? 맙소사. 그런가 보군요. 그래서 직접 돌려주러 온 거예요? 친절하기도 하시지.”
이자벨라는 하얀 손을 뻗어 상자 안의 팔찌를 꺼냈다. 그러고는 제 가느다란 팔목에 팔찌를 채우더니 그의 눈앞에 보란 듯 들어 보였다.
“고마워요, 헤이번.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지 이 팔찌가 보이지 않아서, 어디선가 잃어버렸나 보다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찾게 되어 정말 기뻐요. 더구나 당신이 직접 찾아주어서.”
이자벨라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공작 부인이 그런 선왕비를 보다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헤이번은 부채에 반쯤 가려진 공작 부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것을 보았다. 흥미진진한 광경을 본 듯한, 나이 든 여자의 싸구려 호기심이 그 입매에 묻어났다.
“…….”
헤이번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고 온 거란 말이죠.”
“물론이에요. 왜요? 제가 알아야 하는 다른 뭔가가 있나요?”
이자벨라의 금색 눈과 헤이번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혹시 로제, 아니, 플리타의 전담 하녀에게 이 팔찌를 준 기억은 없습니까?”
“제가요?”
이자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그러더니 호호, 하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 과하네요, 헤이번. 다른 건 몰라도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이 팔찌를 한낱 하녀에게 주겠어요.”
“주지 않았다, 그렇게 확실히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거듭된 헤이번의 물음에 이자벨라가 자세를 똑바로 하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법한 태도였다.
“잠깐만요. 설마, 로제가 저한테서 팔찌를 받았다고 했나요? 그 애가 이 팔찌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이자벨라는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호들갑스럽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의 물음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거군요. 어쩜……. 제가 잃어버린 팔찌를 주워 놓고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이자벨라가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녀장이 기회를 엿보다가 끼어들었다.
“애당초 잃어버리신 게 아니라, 그 하녀가 훔쳤던 게 아닐까요?”
“뭐?”
“잊으셨는지요, 선왕비전하. 그때 그 하녀를 불러 하루 동안 시중을 드는 영광을 베푸셨잖아요.”
시녀장이 준비된 듯한 말을 매끄럽게 내뱉었다. 헤이번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그들이 꾸며내는 ‘연극’을 보았다.
“아아, 그래! 기억나는구나. 기억나. 내가 그때 그 애를 어여쁘게 봐서 시중을 들라 했었지. 공작 부인도 기억하시죠? 플리타의 전담 하녀요.”
“물론입니다, 선왕비전하. 한낱 하녀 주제에 꽤 맹랑한 구석이 있었지요.”
페란테 공작 부인이 그제야 제 차례가 되었음을 깨달았는지 냉큼 대꾸했다. 그러고는 쯧쯧, 혀를 차며 헤이번을 향해 핀잔을 주듯 말을 건넸다.
“그래서 너는 그 하녀의 말을 믿고 그걸 확인하고자 직접 여기까지 온 거니? 맙소사. 천한 하녀의 말 따위가 뭐라고.”
“고모님.”
헤이번이 시선을 돌려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과 맞닥뜨린 공작 부인이 잔소리를 하다 말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이례적인 일이로군요.”
“뭐가 이례적이란 거니?”
공작 부인이 저를 향한 말에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헤이번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혈족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차디찬 시선이었다.
“고모님께서 여태 수도에 머무르고 계시니 말입니다. 공작령으로 진작 내려가셨을 줄 알았는데.”
“뭐, 그거야…….”
“혹시 엘빈 때문입니까?”
그는 공작 부인의 말을 딱 자른 뒤, 다짜고짜 물었다. 지금껏 그들의 대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이에 대해서.
공작 부인의 아들이자 헤이번에게는 고종사촌인, 엘빈 페란테 소공작.
딱히 문제될 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헤이번의 입에서 제 자식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공작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그, 그게……. 아니, 엘빈은 왜 갑자기…….”
공작 부인의 허둥대는 모습에 이자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가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로제와 팔찌에 대한 이야기에서 느닷없이 페란테 소공작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가다니 말이다.
그 둘 사이에 연관이 있을 리도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자벨라는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그가 덤덤한 시선으로 제 고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았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이자벨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가 공작 부인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오히려 그녀가 왕궁에 있다는 걸 알고 방문한 사람처럼.
‘대체 왜?’
이자벨라가 의문을 품은 것과 동시에 헤이번의 입이 열렸다.
“현명하게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고모님.”
“헤, 헤이번.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엘빈이 저지른 일을 말입니다.”
“……!”
이어지는 헤이번의 말에 공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는 제 고모의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습니다. 고모님께서 왜 이렇게 수도를 떠나지 못하시는 건지. 그래서 취미 삼아 한번 알아보았더니,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페란테 공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예법이니 뭐니 하며 늘 깐깐하게 행동하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공작 부인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트루데니츠 은행장과의 면담을 자꾸 추진하시던데요.”
“……!”
공작 부인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파랗게 질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감추고자 했던, 어떻게든 조용히 해결하려 했던 아들의 일을 헤이번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희한한 일이더군요. 페란테 공작가의 안주인이 청하는 면담을, 은행장이 거절하다니 말입니다.”
“…….”
“물론 그 사정을 더 알아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엘빈이 참…….”
“그, 그만!”
공작 부인은 제 아들의 치부가 선왕비의 앞에서 드러날까 싶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제 건방진 조카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시 전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초조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헤이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슈레들.”
그 짧은 단어 하나에 공작 부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슈레들에서 나오던 연금까지 미리 받아 전부 써버린 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페란테의 전 재산이 압류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또한…… 자신의 아들, 엘빈이 광산 투자를 명목으로 더클렌 공작가에서도 꽤 거액을 받아 도박으로 전부 날려버렸다는 것도.
‘그래서 일부러 이 기회를 노려 왕궁을 찾은 걸까.’
공작 부인은 다시 눈을 떴다. 오래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감이란 게 있었다. 더구나 전쟁터나 다를 바 없는 사교계에서 평생 군림하며 살아온, 노회한 부인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제 구겨진 드레스를 매만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공작 부인을, 헤이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아마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제 목적을. 그리고 그런 제 입을 막기 위하여 본인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아들의 실책으로 인하여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한 어미로서는 어떻게든 계속 아들의 흠을 감추려 할 터.
게다가 이 모든 사실을 아직 더클렌 공작가가 모르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들키기 전에 해결하려 할 것이었다.
그 노력이 헛된 물거품으로 끝날 수 있으리란 예상은 애써 묻어둔 채.
헤이번이 냉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그저 이 상황을 이용하면 되었다.
로제를 지켜달라 울먹이던 제 아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억울함을 제대로 호소하지도 못한 채 무너질 듯 저를 보던 그 여자를 위해서도.
“……참, 그러고 보니.”
그 순간, 페란테 공작 부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깨진 찻잔 대신 새롭게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한숨을 작게 내쉰 뒤, 선왕비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선왕비전하와 제 기억에 혼선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자벨라가 헤이번과 공작 부인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금 돌아온 주제에 미간을 모았다. 공작 부인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말입니다. ……선왕비전하께서 플리타를 구한 상이라며, 그 아이의 전담 하녀에게 팔찌를 직접 주셨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고, 공작 부인, 그게 무슨…….”
이자벨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갑자기 공작 부인이 태도를 바꾼 게 이해되지 않았다.
‘눈치 없이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설마 헤이번이 뭔가 협박을 한 걸까. 이자벨라는 조금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소공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듯싶더니 이내 은행장 운운하는 말을 했다.
‘설마 페란테 공작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