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8화 (8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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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과 함께 오신 날 이후, ……로제 양이 외출을 했으니까요.”

집사 역시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두어 번 껌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며칠 전에 제 주인과 함께 같은 마차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왔으니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맞네, 야닉. 그날, 선왕비의 팔찌를 가지고 나가 처분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헤이번이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집사가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무조건 로제 양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 모든 증거가 로제 양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그러니까 더 이상한 것이지.’

헤이번은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순식간에 한 사람을 범인으로 특정 짓도록 상황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이상했다. 누군가가 고약한, 아니, 악의적인 의도로 모략을 꾸민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바로 그때 집무실 밖에서 다다다다, 복도를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집사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공녀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플리타였다. 플리타는 키가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한 채 급히 문을 열었는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집사가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갔지만, 플리타는 그보다 먼저 벌떡 일어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아이를 본 헤이번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것을 본 탓이었다.

“아니에요, 아빠!”

“플리타?”

“로제 도둑 아니에요!”

플리타는 저를 부르는 헤이번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제 할 말부터 했다. 그제야 헤이번은 왜 아이가 이렇듯 급히 저를 찾아온 것인지 이해했다.

“앗, 저기…….”

그 순간, 아이를 임시로 담당하는 하녀가 집무실 문 근처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집사가 그 하녀를 보고는 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찌 된 일인가. 공녀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게야? 더구나 로제 양의 일은 결론이 날 때까지 공녀님께 알리지 말라 하였거늘.”

“사실은 저희끼리 하는 이야기를 공녀님께서 우연히 들으시는 바람에…….”

하녀가 집사의 물음에 눈치를 살피더니 꺼질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집사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는 혀를 찼다.

“그리 조심하라 하였는데 가벼운 입들이 결국 공녀님까지 알게 만들었군.”

집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재차 혀를 찼다. 몸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조심해야 할 공녀가 혹여 충격이라도 받았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야닉.”

그때, 헤이번이 차분한 목소리로 집사를 불렀다. 집사는 그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와 단둘이 있고 싶군.”

“……예, 전하.”

집사가 냉큼 그 뜻에 따라 하녀에게 눈짓을 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녀가 머뭇거리다가 집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들을 일을 걱정하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헤이번과 플리타만이 남았다. 여전히 아이는 아니라고, 로제는 도둑이 아니라고, 그 말만을 되풀이하며 울먹거렸다.

“아빠, 로제는 도둑 아니에요, 흑.”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플리타의 눈가가 벌겋게 부었다. 헤이번은 그 모습에 한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앞에 다가가 섰다.

“흐이잉.”

플리타의 눈에서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헤이번은 그런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플리타.”

“아빠! 로제…….”

“조금만 진정하거라. 그만 울고.”

헤이번은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플리타가 훌쩍이면서도 제 아비의 말에 따르려는 듯 울음을 참았다. 히끅히끅, 소리를 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울지 않으려는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둑……. 로제 도둑 아니에요, 아빠.”

플리타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히끅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제 말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선왕비전하, 우웅, 큰엄마가 줬다고, 저번에 로제가 나한테 그랬어요.”

“……선왕비가 줬다고?”

끄덕끄덕. 아이는 그의 질문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큰엄마가 고모할머니랑 오셨을 때요. 로제가 하루 종일 큰엄마 시중 드느라고 나한테 못 와서, 그래서 보고 싶어서 몰래 로제 방에 갔다가 그 팔찌를 봤어요. 과분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큰엄마가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고. 그래서 돌려드릴 수가 없다고……. 로제가 분명히 나한테 얘기해 줬는데, 히잉.”

플리타가 말을 하다 보니 다시금 서러움이 치밀고 올라온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헤이번은 그런 아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의 푸른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린아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말이라고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었다.

특히 지금 이 일에 대해서는 유모보다 플리타의 말에 더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비록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신빙성이 있었다.

나이 어린 플리타가 그런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전했을 뿐이라는 걸.

“아빠, 믿어 주세요. 로제는…….”

플리타가 입을 삐죽이며 다시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닦았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는다.”

“정말요?”

“로제가 훔치지 않았다고, 나도 믿는다.”

헤이번의 확언에 플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플리타, 믿는다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아. 로제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해.”

“아빠가 해 주면 되잖아요! 아빠는 힘이 세니까 로제를 지켜주면…….”

플리타는 제 아비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듯 외쳤다. 그런 아이의 믿음은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래서 로제를 지켜줄 거라 믿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릇된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럴 수는 있지. 하지만 그럴 경우, 로제는 계속 도둑이란 말을 들어야 할 거다.”

“왜요? 아빠가 지켜줄 건데?”

“그렇다 해서 사람들의 믿음까지 강제로 바꿀 수는 없거든. 신뢰는 그런 식으로 생기는 게 아니란다, 플리타.”

“후웅…….”

플리타가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 살 아이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금 눈물을 닦고는 어떻게든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헤이번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러자 플리타가 냉큼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잔뜩 울어서 그런지 아이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헤이번은 그 작은 몸을 토닥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찾아내야지, 증거를. 그게 안 된다면 만들어내서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선왕비의 말부터 들어봐야 할 터였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제 행동도 달라질 것이기에.

* * *

“헤이번,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방문해 달라 청할 때는 냉정하게 모른 척하더니. 당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시녀가 농담을 한 줄 알았지 뭐예요.”

이자벨라가 웃으며 헤이번을 맞이했다. 그는 선왕비에 대한 예를 표하기 위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는 이자벨라의 뒤편에 서 있던 페란테 공작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침 고모님도 계셨군요.”

“음, 그래. 선왕비전하께서 초대해 주셔서 말이지.”

공작 부인이 형식적으로나마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향해 대꾸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들 두 사람 모두에게 의례적인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곧바로 말을 꺼냈다.

“선왕비께 확인을 받을 것이 있어 부득이하게 방문하였습니다. 미리 연락 없이 찾아온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어머, 그게 무슨 사과할 일이라고요. 이런 방문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니까 앞으로도 종종 와 줘요.”

이자벨라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까르르 웃고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리 앉아요, 헤이번. 마침 공작 부인과 티타임 중이었는데 잘됐네요.”

이자벨라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시녀장에게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하라 지시했다. 그사이에 헤이번이 냉랭한 표정으로 그 맞은편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그런데 제게서 뭘 확인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녀는 본인의 찻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다가 질문했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이미 그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공작 부인만이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헤이번은 그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굳이 내색하지 않고 작은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흐음, 이게 뭔가요?”

이자벨라의 금색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뻔히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수작이 이렇듯 눈에 보일수록 헤이번의 낯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자벨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그녀에게 잘 보이게끔 반대로 돌려놓았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뱉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공작 부인 역시 뭔가 싶어 힐끔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뭔가를 기억했는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곧바로 이자벨라의 눈치를 살피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 역시 헤이번의 눈에 담겼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눈에 익은 물건입니까?”

“……글쎄요. 음, 확실히 눈에 익은, 아니, 제 팔찌로군요. 우르트너 공이 제게 특별히 선물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걸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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