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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7화 (8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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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이 일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밝혀내도록 하게.”

그는 차디찬 시선으로 하녀장과 로제, 그리고 유모를 차례대로 본 뒤에 다시금 말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 일이 단순한 절도인지.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어 꾸며낸 일인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모의 얼굴이 순간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헤이번은 유모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로제에게 다시 시선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하녀장에게 지시를 한 뒤, 몸을 돌렸을 뿐.

집사가 방을 나서는 주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그리고 방 밖에서 기웃대던 고용인들은 다시금 썰물처럼 양쪽으로 비켜섰다. 헤이번은 그렇게 열린 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

“……예, 전하.”

로제가 멍하니 있다가 그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네 결백이 증명될 때까지는 너를 모든 일에서 배제하도록 하겠다. 플리타의 침실에도 출입을 금할 테니, 근신하고 있도록.”

“저, ……알겠습니다.”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항변하려다가 이내 수긍하고는 대답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지시였다. 어쩌면 ‘도둑’일지도 모르는 하녀를 딸의 곁에 두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속이 쓰리단 말로는 부족했다.

헤이번은 자신이 내린 근신 명령에 로제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방 안을 둘러보다가 혀를 찬 뒤, 서둘러 그를 따라 나갔다.

헤이번이 다녀간 자리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깨고 하녀장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제. 우선 네 방으로 가 보도록 하자. 네 방과 소지품을 전부 살펴봐야겠다.”

“예, 그러셔야죠.”

로제는 잠시 기운이 빠져 있다가 다시금 이를 악물고는 마음을 추슬렀다.

결백이 증명되면 다 해결될 일이다. 훔치지 않았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하녀장이 로제의 방으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 * *

기묘한 광경이었다. 대공 저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도둑을 잡겠다며 방을 수색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것을 구경한답시고 대공 저 안의 고용인들 대부분이 마치 쥐 떼처럼 줄을 지어 가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로제는 저를 향한 시선들 속에서도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시선들은 이미 저를 도둑이라 낙인찍고 있는 게 대다수였다. 그나마 제게 호의를 표했던 베로니카 정도가 혼란스러워하며 저를 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다다른 방 앞에서 하녀장이 로제를 돌아보았다.

“네가 방 주인이니 먼저 들어가려무나.”

하녀장의 말에 로제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녀장과 유모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뭐야. 별것 없잖아?”

“그러게. 오히려 우리 방보다 더 초라한데?”

“흥, 귀중품들은 다 어딘가에 숨겨뒀겠지.”

방 안을 기웃거리며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하녀장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유모가 움직였다. 그녀는 다소 조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서랍장을 향해 다가가더니 냉큼 서랍을 열고는 크게 외쳤다.

“어머! 여기, 내 목걸이! 이건 내 급여 봉투잖아!”

유모의 커다란 외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안착한 곳은 바닥에 나뒹구는 것들 위였다.

방금 유모가 바닥에 내던진, 그녀의 물건으로 보이는 장신구와 현금다발 위로.

“왜, 왜 그런 게…….”

그것을 본 로제의 얼굴에 당혹감이 짙게 드리웠다. 그녀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달싹였다. 왜 유모의 물건들이 제 서랍장 안에 들어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서랍 안에 그런 건 들어 있지 않았다. 로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는 훔치지 않았…….”

짜악.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모가 다가와 냉큼 따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녀장이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잖아!”

유모는 제게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진 로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로제는 벌겋게 손자국이 난 뺨을 만지며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닙, 아닙니다. 유모님. 저는…….”

“이걸 보고도 아니라고 발뺌할 거니? 혹시 다른 것도 더 훔친 거 아니야? 한번 보자.”

유모는 기세등등하여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서랍장을 마구 뒤졌다.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로제의 물건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중에는 지난번 헤이번이 선물한 장신구도 있었다.

그 하루의 추억이 짓밟혔다. 단 하루, 제게 꿈 같았던 날의 흔적이 무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로제가 망가진 목걸이를 주우려고 손을 뻗는 순간, 유모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더욱 크게 외쳤다.

“세상에, 이게 뭐야!”

가뜩이나 유모의 행동에 호기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더욱 집중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돌리고는 난리를 쳤다.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잖아? 딱 봐도 귀한 팔찌인데.”

……팔찌.

망가진 목걸이를 손에 쥔 로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제야 유모가 서랍 안에서 무엇을 꺼냈는지 깨달았다.

바로 선왕비가 제게 억지로 떠넘기듯 주었던.

“어머! 그러고 보니 이거 선왕비전하의 팔찌 아니니? 내가 선왕비전하께서 이 팔찌를 가지고 계시는 걸 분명히 본 기억이 나는데.”

유모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외쳤다. 하녀장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과 동시에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광경을 본 유모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설마 선왕비전하의 팔찌까지 훔친 거니? 어쩜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태연하게!”

“아, 아닙니다! 그건 선왕비전하께서…….”

로제가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려는 순간,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커져 그녀의 목소리를 단번에 묻어버렸다.

선왕비전하의 팔찌를 훔치다니.

그것은 단순한 절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 * *

“……선왕비의 팔찌?”

헤이번은 집사의 보고를 듣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물었다.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 연락하여 확인해 봐야겠지만, 유모의 말로는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선왕비전하께서 방문하셨을 때 본 기억이 있다고. 페란테 공작 부인과 함께 방문하셨을 때 말입니다.”

“…….”

“설령 유모의 말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찌 되었든 로제 양의 방에서 발견된 팔찌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인 건 확실합니다. 팔찌에 박힌 보석의 등급도 그렇고, 그 세공 수준 역시…….”

집사는 침묵하는 주인을 향해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헤이번은 그런 집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랜 시절 괸터스를 위하여 일해 오면서 갖게 된 집사의 눈썰미가 상당한 수준이니 말이다. 웬만한 보석 감정사보다 더 정확한 눈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런 물건이 로제의 방 서랍장 안에 들어 있었다는 건가.”

“예, 전하. 유모가 서랍을 열어 본인의 물건을 찾아낸 뒤에 다른 게 더 있을지도 모른다며 서랍 깊숙한 안쪽을 뒤지다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

헤이번은 집사의 말을 듣고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뭔가를 고심할 때 종종 나오는 버릇이었다.

집사는 제 주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조차 크게 쉬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헤이번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로 향했다. 집사가 보고한 내용을 더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었다. 로제의 방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하다못해 유모가 그 방에서 했던 말 한 마디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기재되어 있는.

그것을 집어 든 헤이번이 서늘한 시선으로 서류에 쓰여 있는 내용을 훑어보다가 다시 집사를 쳐다보았다.

“이상하지 않나?”

“예?”

집사가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헤이번이 방금 훑어본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툭 튕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본인이 도둑맞았다고 한 것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너무 잘 알았어. 로제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단번에 그 위치를 찾아냈으니 말이야.”

유모는 로제의 방을 여기저기 다 뒤지지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정확히 그 서랍만을 연 것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 선왕비의 팔찌까지 나왔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조소를 머금은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과연 진짜 도둑이라면 이렇게 본인의 방에 훔친 물건들을 버젓이 놔두었을까? 더구나 이런 식으로 누구나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서랍 안에?”

헤이번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고는 다시 보고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내가 도둑이라면 물건을 훔치자마자 밖으로 빼돌려 처분했을 거야.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까.”

증거는 없애고, 현금은 확보하고.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집사가 헤이번의 말에 반박하고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로제 양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 아아.”

그러나 집사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는지 그대로 말을 중단했다. 헤이번이 집사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의 물건은 어제 청소한 이후 없어졌다고 하니 제외해야겠지만, 적어도 선왕비의 팔찌는…… 처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

유모는 그 팔찌를 페란테 공작 부인과 선왕비가 함께 방문하였을 때 봤다고 했다.

물론 며칠 전에 선왕비가 플리타의 회복을 축하한다며 방문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로제와 선왕비의 접점 자체가 없었다. 마차에서 저와 함께 내린 로제가 선왕비와 잠시 마주쳤던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날 선왕비는 저와 로제를 보고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변하여 화를 참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대로 가버렸으니까.

그러니 유모가 봤다던 날밖에 없었다. 페란테 공작 부인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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