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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6화 (8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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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저가 발칵 뒤집혔다.

유모의 방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하녀장이 굳은 표정으로 찾아왔다. 유모의 방 앞에는 그 소식을 듣고 모여든 고용인들이 웅성대며 서 있었다.

“다들 비키거라.”

하녀장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자 문 앞을 가로막다시피 모여들었던 하인과 하녀들이 양쪽으로 비켜서서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호기심까지 사라지지는 않은 듯 그들의 시선이 전부 방으로 향해 있었다.

하녀장은 혀를 차고는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모의 방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그 난장판 한가운데에서 유모가 씩씩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 로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하녀장은 유모와 로제를 차례대로 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미겔 부인?”

“아! 하녀장님, 오셨군요.”

유모가 그제야 하녀장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녀장님도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과 저축해 두었던 돈이 전부 사라졌답니다. 어제 로제가 방 청소를 하기 전까지는 바로 여기, 서랍장 제일 위 칸에 분명히 들어 있었는데 말이에요.”

“…….”

“그래서 로제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모른단 말만 되풀이하고. 에휴, 정말 답답한 노릇이지요. 저 외에는 로제밖에 이 방에 출입한 사람이 없는데…….”

유모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할 얘기는 다 한 셈이었다. 누가 들어도 로제가 범인이라 돌려 말하는 중임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방 밖에서 귀를 기울이며 뭐라도 들으려고 기웃거리던 고용인들이 수군거린 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래서 사람을 잘 뽑아야 하는 건데 말이지. 단순히 공녀님을 구했단 이유만으로 전담 하녀가 된 것부터가 잘못된 거라고.”

“혹시 공녀님을 구했던 일도 계획적으로 꾸민 거 아니야? 누가 알아? 일부러 의도적으로 접근했는지.”

“헉! 설마 공녀님을 떠밀어 물에 빠뜨리고 구한 척한 거 아니야?”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그 말을 듣던 로제는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주먹을 꽉 쥔 터라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면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래도 그 통증 덕분에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아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다.

그녀는 저를 험담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억울한 마음이 치밀고 올라왔다. 다른 말은 몰라도 제 아이를 일부러 물에 빠뜨렸다는 억측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제 손으로 해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한 항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로제.”

그 순간,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가 호흡을 고르고는 시선을 들어 하녀장을 쳐다보았다.

유모의 말을 전부 들은 하녀장이 몸을 돌려 로제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하녀장은 그 얘기만 듣고선 저를 도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네가 어제 이 방을 청소했다고?”

“예, 하녀장님.”

로제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울지도 않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물음에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 로제의 태도를 본 하녀장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하녀장은 여전히 덤덤한 투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때, 청소하면서 유모가 말한 장신구 같은 걸 보았니?”

“그……. 아니요.”

로제가 하녀장의 물음에 대답하려다가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직후 웅성대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녀장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로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부연 설명을 했다.

“유모님께서 서랍장 제일 위 칸에는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서랍은 청소하지 않았고요. 그 외에 방 안의 다른 곳에서는 말씀하신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로제의 말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하녀장이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려 유모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무언의 질문을 알아차린 유모가 펄쩍 뛰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으니 더욱 조심해서 청소하라고 했지!”

“예? 아니, 하지만 분명히…….”

로제는 제 말을 부정하는 유모의 말에 재차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하녀장이 먼저 끼어들어 그들의 대화를 끊은 뒤, 유모에게 질문을 건넸다.

“도둑맞았다는 것이 전부 서랍장 위 칸에 들어 있었던 건가요?”

“예. 그래서 더욱 조심하라 일렀어요. 제가 가진 전 재산이라 할 수도 있는 것들이니.”

유모는 억울한 표정으로 하녀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하녀장이 서랍장 쪽으로 다가가 확인했다. 사실, 확인이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활짝 열려 있는 서랍 안은 전부 텅 비어 있었으니까.

하녀장이 서랍장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방 입구 근처에서 여전히 웅성대던 이들을 향해 질문했다.

“로제가 청소한 뒤에, 이 방에 들어간 누군가를 본 사람?”

하녀장의 질문에 다들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수군거리더니 이내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 광경을 본 유모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하녀장이 다시 말을 하려는 순간,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용인들이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힐끗 고개를 돌렸다가 황급히 숨을 들이쉬고는 재빠르게 비켜섰다.

바로 헤이번이 집사와 함께 온 것이었다. 그 역시 소식을 접한 듯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하.”

하녀장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한 뒤, 옆으로 물러섰다. 헤이번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입술을 꾹 깨문 채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전하, 저는 어찌합니까.”

그때, 유모가 기다렸다는 듯 헤이번에게 다가가 호소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없어진 물건 중에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제게 물려주신 목걸이도 있습니다. 이대로 되찾지 못한다면 제가 죽어서 어머니 얼굴을 어찌 보겠어요. 게다가 공녀님의 유모로서 성심껏 일하며 받은 급여도 노후를 위해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모아두었는데, 그것도 전부 도둑맞았으니…….”

유모는 헤이번의 동정심을 일으키려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지만, 헤이번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하녀장에게 물었다.

“로제 말고 방에 드나든 사람이 없다, 그건가?”

“예, 전하. 일단은…….”

하녀장이 말을 하다 말고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 저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라 할 수 있었다.

집사 또한 하녀장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을 이곳에서 일해 온 그의 자부심에 흠이 생긴 것이다. 고용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주인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였으니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딱 봐도 범인이 나왔잖아.”

그때, 누군가가 작게 수군거렸다. 하녀장이 헤이번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방 밖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있는 자리에서 경솔하게 군 것을 탓하는 시선이었다.

그에 움찔한 것인지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침묵이 대신했다.

로제는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억울하단 말 한 마디로 제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또한 서글픈 마음도 들었고, 이대로 다 포기하고 사라져버리고도 싶었다.

무엇보다도 헤이번의 눈앞에서 도둑으로 몰린 채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저를 범인이라 여긴다고 할지라도 아이를 생각하면 버틸 수 있었다.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아이와 그의 곁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헤이번이 나를 도둑이라 생각한다면…….’

로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저 생각만 하였을 뿐인데도 숨이 막히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것만은 싫어. 그런 오해를 받는 건.’

그 순간, 헤이번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래서 로제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건가?”

“로제 말고는 제 방에 들어온 사람이 없으니까요!”

유모가 그의 말에 냉큼 끼어들더니 로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돌려 말하는 대신, 이제는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지목했다.

하녀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정황상 로제가…… 가장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헤이번이 하녀장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로제, 네게 묻겠다. 이 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갔나?”

“아니요. 절대로 그런 적 없습니다.”

로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녹색 눈과 그의 푸른 눈이 서로 교차했다.

하지만 헤이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시선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이 꽉 움켜쥔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는 로제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하녀장.”

“예, 전하.”

“자네가 이 일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밝혀내도록 하게.”

“……!”

하녀장이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로제 쪽을 보았다. 헤이번이 그녀를 두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사실, 그게 ‘헤이번 괸터스’다운 행동이기는 했다. 누구에게나 냉철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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