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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5화 (8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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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지하게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생긴 멍을 묵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도 그와 비슷한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들으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티 하나 없는, 맑고 순수한 웃음소리였다.

“아니에요, 전하. 괴롭힘이라니요. 그런 거 없어요. 다들, 얼마나 제게 잘해 주는데요.”

로제는 밝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헤이번이 미덥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재차 물었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고?”

“예.”

“하지만 네가 다른 고용인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걸 본 적 없는데…….”

그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건 마치 그녀를 언제나 훔쳐보고 있었던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헤이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로제는 그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아직은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죠.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에요. 아! 조금 친해진 사람도 생겼는걸요. 베로니카라고…….”

로제는 저도 모르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함께 살던 시절, 시시콜콜한 마을 이야기까지 그에게 늘어놓던 것처럼.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두근 뛰었다. 그가 저를 염려하고 걱정한 게 너무나 좋았다. 혼자 착각하여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와 달리 환하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던 헤이번이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짓는 줄도 모른 채.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쥔 줄도 모른 채.

그 주먹 쥔 손에 열이 오른 줄도 모른 채.

* * *

“……우웅?”

플리타가 헝겊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그림책을 넘기다 말고 로제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아이의 머리에 로제가 달아준 리본이 고갯짓에 팔랑팔랑 나비처럼 흔들렸다. 그중 한쪽 리본이 반쯤 풀려 아이의 어깨 밑으로 축 늘어졌다.

평소대로라면 아이의 리본이 풀리자마자 로제가 알아차려 냉큼 묶어주었을 텐데, 지금 로제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로제가 플리타에게 새 헝겊 인형을 만들어준다고 바느질을 하다 말고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숨. 또 손부채질.

그 모습을 바로 코앞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강아지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그대로 일어나 플리타가 앉아 있는 카펫으로 다가왔다.

“하양아, 네가 봐도 이상하지?”

플리타는 강아지를 냉큼 품에 안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그러자 강아지가 아이의 품에 먼저 안겨 있던 헝겊 인형에게 샘을 부려 침 범벅을 만들어 놓다가 냉큼 대답했다.

“멍!”

플리타는 작게 짖은 강아지를 착하다며 쓰다듬다가 다시 로제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그렇게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아이가 굳은 결심을 한 듯 입을 앙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공녀님?”

로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제 앞에 다가온 플리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대답 대신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공녀님?”

“……으응?”

로제는 아이의 뜬금없는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상해.”

“뭐가요?”

“이마가 안 뜨거워.”

“예?”

로제는 플리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마가 안 뜨겁다고 하는지, 아니, 이마가 뜨거워야 하는데 안 뜨거워서 이상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플리타가 그런 로제를 보더니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로제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는데, 이마는 안 뜨겁잖아. 열이 나는 건지 알았는데.”

“……열요?”

“응. 아까부터 손으로 이렇게 막 부채질을 했잖아.”

플리타는 로제의 흉내를 내려는 듯 작은 손을 얼굴 가까이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로제가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는 민망한 마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공녀님.”

“근데 왜 자꾸 부채질했어? 한숨도 막 푹푹 쉬고. 얼굴도 빨갛고.”

“그건…….”

로제는 아이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헤이번과 계단에서 마주친 일을, 그리고 그가 저를 주치의에게 데려다주었던 일을 계속 곱씹어보느라 그랬단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혹시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아닌지 걱정하던 그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그랬단 말을, 아이의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계속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저 계단에서 마주쳤을 뿐이고, 헤이번으로서는 본인의 저택 내 고용인에게 사소한 호의를 베풀어준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딸의 전담 하녀에게 무심코 건넨, 그저 사소한 배려 정도.

그것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혼자 얼굴을 붉히는 제가 문제였다. 아이의 말대로 자신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 리본이 풀어졌네요. 다시 묶어드릴게요.”

로제는 화끈거리는 얼굴의 열을 애써 식히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는 플리타를 돌아앉게 한 뒤, 느슨해진 리본을 다시 묶어주려 했다.

“아!”

바로 그때, 아이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손뼉을 치더니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혹시 아빠 좋아해서 그래?”

“……예?”

로제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플리타는 아무렇지 않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유모가 그랬는데, 로제가 아빠 좋아한댔어. 그래서 막, 으응, 꼬리? 꼬리, 뭐라고 했는데?”

아이가 말을 하다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흔들리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아이가 해맑게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꼬리는 우리 하양이한테만 있는 거잖아. 그치? 유모가 뭘 잘못 알았나 봐.”

플리타는 금세 어린아이답게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로제는 이어진 강아지의 꼬리에 대한 아이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대체 어린아이에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유모가 플리타에게 그런 저급한 말을 서슴없이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저에 대한 험담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플리타의 앞에서 함부로 한단 말인가.

아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좋은 말, 예쁜 말만 들어야 하는 아이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간 것 자체가 싫었다.

그 순간, 로제가 강아지의 꼬리를 잡고 놀다가 다시 해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로제, 아빠 좋아해?”

잠시 꼬리 이야기로 엇나가기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로제는 되돌아온 질문에 화를 가라앉힌 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를 닮은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

그를 닮아 눈부신 아이의 금빛 머리칼.

그렇게 저와 그를 골고루 닮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에게 제 아빠에 대한 감정을, 거짓으로 말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 모든 건 그저 핑계일지 모르지만.

“……예, 좋아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마음은 저를 꾀어냈다. 아이와 단둘이 있으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겠느냐고.

아이의 품에서 노는 강아지가 밖에 나가 제 말을 퍼뜨릴 수도 없으니.

“진짜?”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털어놓은 진심에, 아이는 신이 나서 눈을 반짝였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향해 당부하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끼리 비밀로 해요, 공녀님.”

“왜? 아빠한테 말하면 기뻐할 텐데.”

플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로제가 머뭇거리다가 어색한 투로 대답했다.

“……제가 부끄러워서요.”

플리타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까르르 웃었다.

“뭐야, 그게. 로제는 어른인데 부끄러워?”

아이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에헴, 하며 로제를 토닥토닥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비밀로 해 줄게. 그 대신…….”

플리타가 말을 길게 늘이더니 로제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강아지가 아이에게서 폴짝 뛰어내려 근처에 있던 털실 뭉치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부끄러우면 아빠한테 꼭 말해 줘.”

아이는 로제의 다리를 두 손으로 짚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로제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아빠가 많이 기뻐할 거야.”

“……그럴까요?”

로제는 플리타의 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고 있다가 조금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로제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해줬을 때 무지무지 기뻤거든.”

아무런 뜻도 없는, 그저 어린아이의 순진한 말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로제의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그녀는 한숨처럼 웃음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로제!”

공녀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유모였다. 로제는 플리타를 품에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모가 서슬 퍼런 모습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로제, 네가 어제 내 방을 청소했니?”

“예……. 유모님. 제가 청소했습니다.”

로제는 느닷없이 제게 추궁하듯 질문하는 유모의 모습에 당황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청소를 하라고 시킨 장본인이 바로 유모였던 탓이다. 그런데 하루 만에 본인이 시킨 것을 잊었나 싶어 어리둥절했다.

그런 로제를 보던 유모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투의 목소리였다.

“그럼 내 방에 있던 장신구에 혹시 네가 손을 댔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해하던 로제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뭔가 저를 노린 덫이 놓인 것만 같은.

“네가 내 방을 청소하고 난 뒤에 내 장신구가 모조리 없어졌어! 더구나 내가 받은 급여도 없어졌고!”

“……뭐라고요?”

유모가 언성을 높여 외친 소리에 로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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