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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4화 (8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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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개진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말을 돌렸다.

“참, 팔은 어떻지?”

“팔도 거의 다 나았습니다.”

“정말인가?”

“예, 부목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요.”

로제는 그의 질문에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고 제 팔을 내밀었다. 물론 그에 앞서 연고를 다시 주머니 속에 쏙 넣는 걸 잊지 않았다.

헤이번은 제 앞에 들이밀어진 가느다란 팔을 보다가 괜히 빈손을 한 번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직접 잡아 확인하고 싶단 생각이 든 탓이었다.

“……다행이군.”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편히 지나가도록 로제가 계단 옆으로 몸을 더욱 바짝 붙여 물러선 순간이었다. 그녀의 앞을 스쳐 간 헤이번에게서 그 특유의 체향이 전해졌다.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그를 꼭 빼닮은.

로제가 반사적으로 숨을 몰아쉬고는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계단을 내려가던 헤이번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로제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그를 담고 있는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로…….”

헤이번이 로제를 부르려는 순간,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급히 계단을 올랐다.

그 다급한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바로 돌아서서 가지 않고 저를 보고 있었단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들키자 허둥대며 얼굴이 빨개져 달아나는 그녀가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앗!”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로제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갑자기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을 웅크린 탓이었다.

“로제?”

헤이번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에도 로제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통을 참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아까 수잔이 휘두른 빨래방망이에 잘못 맞았던 옆구리 쪽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온 탓이었다.

“로제! 대체 무슨 일이야?”

헤이번이 그녀에게 다가가 급히 물었다. 그러고는 로제의 대답을 기다릴 새 없이 냉큼 그녀를 살폈다. 혹시 계단을 급히 올라가다가 발목을 접질린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건 다른 쪽이었다.

그는 로제가 제 옆구리 쪽을 손으로 짚은 채 끙끙대는 걸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잠시 실례하지.”

“예? 으윽!”

헤이번이 로제의 옆구리로 손을 가져갔다. 뒤이어 그의 손이 닿기 무섭게 로제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헤이번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저, 그냥 좀 부딪쳐서…….”

로제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아픈 와중에도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다시 실례해야겠어.”

“저, 전하!”

헤이번이 로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냉큼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 바람에 놀란 로제가 몸을 버둥거렸다.

“내려주세요, 전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주치의에게 가야 해.”

“제가, 제가 갈 테니…….”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대로 묵살되었다. 로제를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었다. 단순히 발목이 접질린 게 아니기에 그랬다. 옆구리가 아픈 건 다른 질병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헤이번은 그녀가 내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걸 묵살한 뒤, 주치의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주치의의 방에 갈 때까지 어느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저, 전하?”

주치의는 문이 벌컥 열리자 깜짝 놀라 일어섰다가 이내 헤이번을 보고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품에 안긴 로제를 보고는 더욱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런 주치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보다가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소파 위에 로제를 조심스럽게 앉힌 뒤, 입을 열었다.

“옆구리에 통증이 있는 것 같더군.”

“예? 아, 전하께서…….”

주치의는 다짜고짜 증세를 이야기하는 헤이번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말을 꺼냈다. 느닷없이 하녀를 안은 채 나타난 대공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로제 말이야.”

헤이번이 그런 주치의의 착각을 정정하고는 로제를 가리켰다. 주치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보았다.

“아아, 로제 양이……. 어디 봅시다. 어디가 어떻게 아픕니까? 옆구리에 통증이 있다고요?”

“예, 그런데 별것 아니에요. 아까 조금 부딪쳐서 멍이 들었거든요.”

로제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다가 해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미 정신을 차리고 환자를 볼 준비가 된 주치의에게는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한번 확인은 해야지요. 어디 봅시다.”

“하지만 선생님.”

로제가 난감한 마음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주치의의 태도는 완강했다. 더구나 헤이번 역시 팔짱을 낀 채 서서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블라우스를 살짝 걷었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로제가 아픈 것만 신경 쓰다 보니 그녀의 옷 안쪽을 보게 되리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인의 몸을 함부로 보는 건…….’

그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려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로제의 옆구리에 든 시커먼 멍을 본 탓이었다.

“아이고……. 멍이 심하게 들었군요.”

주치의 역시 혀를 차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헤이번이 그 곁으로 다가와 로제의 옆구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로제는 그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고는 살짝 걷어 올렸던 블라우스를 끌어내렸다.

“뼈를 다친 건 아닌가?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데.”

헤이번이 시선을 돌려 주치의를 향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주치의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촉진해 보니 단순한 타박상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피부가 약한 편이라 멍이 잘 드는 체질인 듯합니다.”

“타박상이라고?”

“예, 전하.”

헤이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로제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조금은 볼멘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멍이 든 거라고 말했는데.”

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헤이번이 시선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그의 시선에 곧바로 어깨를 움츠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험험.”

그 순간, 주치의가 헛기침을 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과 로제가 주치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그저 젊은 두 남녀로 보였다.

주치의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저택 내에 떠도는 소문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들의 관계가 수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않나.’

주인이 예쁘장한 하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데. 게다가 그 하녀의 심성이 온순하고 착하니 딱히 문제될 일도 없을 것 같고.

주치의는 나름대로 생각하다가 다시금 헛기침을 한 뒤, 로제를 향해 말했다.

“타박상에 효과가 좋은 크림을 줄 테니, 가지고 가서 틈날 때마다 잘 바르도록 해요.”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주치의가 제게 꾸벅 인사를 하는 로제를 향해 깜빡 잊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제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호흡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예?”

“혹은 움직일 때 숨이 가쁘다거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거나…….”

주치의의 말에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별관에서는 항상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입술도 파랗고 안색도 안 좋아서 말이지요. 지금도 얼굴이 창백한데.”

“……아, 예. 원래 핏기가 좀,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저 원래 그렇다고 하기에는…….”

주치의는 의문이 남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이 주치의와 로제를 번갈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뭘까.’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주치의의 말에 헤이번 역시 그냥 그 느낌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하긴,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줄 알아야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면 나를 찾아오도록 해요, 로제 양.”

“예,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로제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는 주치의에게서 크림을 받아 가지고 몸을 돌렸다. 헤이번은 어느새 주치의의 방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전하. 죄송해요.”

“아니. 그런 건 사과할 필요 없는데…….”

헤이번은 복도의 벽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젓다가 로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뭔가 물어볼 말이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

로제가 그 시선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나서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 전 주치의가 했던 말에 혹시 그가 의문을 품은 게 아닐까, 싶었다. 제 병에 대하여 뭔가 눈치를 챈 건 아닌지…….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 하는 것인지.

“혹시…… 말이야, 로제.”

“예?”

로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또한 그런 그의 반응에 로제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 악순환 속에서 헤이번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괴롭힘을 당하는 건가?”

“……괴, 괴롭힘요?”

잔뜩 긴장해 있던 로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보았다. 헤이번의 표정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고용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솔직히 털어놔. 내 집 안에서 이런 식의 폭력은 용납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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