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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좋겠어. 운 좋게 공녀님 모신 덕분에 거액의 돈도 받고, 드레스도 받고. 누가 보면 하녀가 아니라 이 저택의 아가씨인 줄 알겠네.”
로제는 세탁실에 빨랫감을 가져다 놓고 돌아서려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누가 봐도 저를 향한 말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또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곱상하게 생겨서 꼬리를 치는 거지. 제 주제도 모르고.”
“듣자 듣자 하니까 너무하네요.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해요, 수잔.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게 더 꼴사나운 거 알아요?”
로제가 저를 향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그저 입술만 깨물고 나가려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대신하여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뭐야? 베로니카, 넌 누구 편이야?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다 똑같이 이곳에서 일하는 처지에 누구 편을 들어요?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의 편이라고요.”
로제는 슬그머니 몸을 돌려 세탁실 안을 보았다. 지난번에도 저를 두둔해 주었던 하녀, 베로니카가 이번에도 제 편을 들며 다른 하녀들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로제가 난처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로 인하여 벌어진 싸움이니 이대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 그래! 한번 해 보자, 그거지?”
‘맙소사.’
그러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단순한 말싸움이었던 상황이 점차 과격해지더니 이내 저마다 빨랫방망이를 움켜쥐고 휘두르기 직전이 된 것이다.
“잠, 잠깐만요! 그러지 마세요! 다들 진정 좀 하시, 앗!”
로제가 빨랫방망이를 움켜쥔 하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잘못 휘두른 방망이에 맞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종이 인형처럼 세탁실 한쪽에 처박혔다.
“어머나! 괘, 괜찮아?”
“어휴, 수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저리 비켜봐요. 로제,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싸우던 수잔과 베로니카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로제에게 다가왔다. 로제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
“어디 봐요. 갈비뼈라도 부러진 거 아니에요? 수잔 힘이 보통 세야 말이죠.”
“베로니카, 너!”
베로니카가 로제의 옷자락을 젖히며 말을 건네자 수잔이 발끈하여 그에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바로 로제의 옆구리가 드러나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그새 멍이 시커멓게 들었네.”
“아니, 정통으로 맞지도 않은 것 같은데. 분명히 스치기만 했단 말이야.”
수잔이 변명처럼 말하며 인상을 썼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내심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을 눈치챈 베로니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조금 누그러진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밥 잘 먹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요. 그 바람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아니, 나는…….”
수잔은 베로니카의 타박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가 그런 수잔을 다시 한번 흘겨보더니 로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로제, 괜찮아요? 치료사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뼈라도 부러진 거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멍이 좀 들었을 뿐이에요. 원래 멍 같은 게 잘 생겨요. 피부가 약한 편이라.”
로제는 난처한 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멍이 잘 생겨도 그렇지. 이렇게 시커멓게 멍이 든다고요?”
“멍이 원래 잘 생긴다고 하잖아! 게다가 내 방망이가 빗겨 갔다니까 그러네!”
수잔이 냉큼 끼어들어 제 변명을 재차 늘어놓았다. 혹시 로제가 다친 책임을 물을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수잔 말이 맞아요.”
로제가 애써 웃으며 수잔의 말에 동의했다. 굳이 수잔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정도에서 다툼이 마무리된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가 옆구리의 통증을 내색하지 않으며 몸을 일으키자 베로니카가 미덥지 못한 듯 냉큼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수잔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그대로 빨랫감을 안고 몸을 돌렸다.
“어휴, 미안하단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베로니카가 그런 수잔의 뒤통수에 대고 뭐라 하려는 걸 로제가 만류했다.
“그만해요, 베로니카. 괜찮아요.”
로제는 베로니카의 팔을 잡고 고개를 재차 저었다. 그러고는 함께 세탁실을 나오다가 베로니카를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내가 뭘 했다고…….”
베로니카가 멋쩍어하며 콧등을 찡그렸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밝은 목소리로 농담을 건넸다.
“편들어주는 사람 있으니까 좋던데요?”
“흥.”
베로니카가 멋쩍은 마음을 감추려고 괜히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랑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에요?”
“예?”
“저번에 다들 봤어요. 로제가 대공 전하의 마차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도 같이 온 거요. 게다가 예쁜 드레스까지 입고 마차에서 내렸잖아요.”
“…….”
로제가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베로니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수잔이 저러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우리 중에 대공 전하를 짝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감히 우리 주제에 어떻게, 하고 마음을 접는 거죠. 그런데 로제가 대공 전하랑 좀…… 그래 보이니까 질투도 나고 그러는 거예요.”
사실 나부터도 부럽던데. 베로니카가 머쓱해 하면서도 덧붙여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제가 뒤늦게 고개를 저으며 나름대로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베로니카. 그날은 전하께서 제게 호의를 베풀, 아니, 공녀님의 병이 회복되어 그것을 축하하시고자 선물을 사려 하셨는데,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볼일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전하를 따라가게 되었던 것뿐이에요.”
로제는 오해를 풀고자 평소보다 더 길게 말했다. 그 노력 덕분일까. 베로니카가 로제의 말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왕비전하께서 아무리 들이대도 냉담하기만 하신 분이……. 아, 이건 로제를 무시해서 하는 말 아닌 거 알죠? 우리 같은 하녀가 넘볼 분이 아니니까…….”
“알아요. 베로니카의 말이 맞는걸요.”
로제는 베로니카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다시금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로제가 선왕비전하보다 예쁜 거 알아요?”
“예? 그게 무슨…….”
“정말이에요. 게다가 사내들은 원래 로제처럼 가냘프고 청초한 미인을 더 좋아한다고요. 선왕비전하처럼 오만하고 드센 미인보다는, 합, 이건 우리끼리 있으니까 한 얘기예요. 다른 사람한테 하면 안 돼요.”
베로니카가 말을 잇다가 황급히 제 입을 다물었다. 선왕비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했다가 야단이라도 들을까 싶어서였다.
로제가 그런 베로니카를 안심시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 나는 주방에 가 봐야 하는데.”
“저는 공녀님께 가야 해요.”
“그럼 나중에 봐요, 로제.”
베로니카가 로제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주방이 위치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플리타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베로니카가 꺼낸 얘기 때문일까. 문득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로제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중간쯤에 멈춰 서서는 제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조금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연고였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다시 연고를 꽉 움켜쥐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저 상처에 바르는 연고일 뿐이었다. 다쳐서 상처가 나면 바르는.
귀족만이 바를 수 있는 귀한 연고도 아니었다. 누구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단순한 연고일 뿐인데, 어째서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걸까.’
로제는 연고를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되새겨 보면 꿈 같은 하루였다. 함께 아이의 선물을 골랐고, 그에게서 드레스 등의 선물을 받았다. 새 구두를 신고 걷다가 살갗이 쓸려 상처가 나자 그가 직접 연고를 사다가 발라주었고, 붕대까지 정성껏 감아주었다.
그녀는 그날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은 제게 다가와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제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던 헤이번을. 그 남자의 큼직한 손을. 그 다정한 손길을.
그 기억이 제 시간 속에 오롯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 기억이 제 남은 시간을 더욱 반짝이게 해 줄 터였다.
로제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흐릿한 미소와 함께 연고를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문득 귓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 위쪽에서 누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옆으로 비켜섰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탓에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발소리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이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내려가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로제가 서 있는 계단, 바로 위의 계단을 밟고.
“발목의 상처가 아직 덜 나았나?”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로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남자, 헤이번이었다.
로제가 잠시 멍하니 그를 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연고는 왜 가지고 있지?”
“예? 아, 이건…….”
헤이번이 눈짓으로 가리킨 제 손에는 연고가 들려 있었다. 연고를 쥐고 있다는 것조차 잠시 잊고 있었던 로제가 당황하여 연고를 등 뒤로 숨겼다.
어차피 그에게 들킨 상황이니 뒤늦게 숨겨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