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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2화 (8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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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선왕비전하!”

이자벨라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뒤늦게 소식을 접한 유모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계단을 내려왔다.

“…….”

유모를 본 이자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가듯 잠시 시선이 교차했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자벨라는 눈을 돌리더니 응접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겔 부인, 공녀님은 홀로 두고 이리 나온 건가요?”

유모가 잰걸음으로 냉큼 그 뒤를 쫓아가려는데, 뒤따라온 하녀장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 질문에 유모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홀로 두다니요. 공녀님 곁에는 당연히 전담 하녀가 붙어 있으니…….”

“로제는 오늘 외출했잖아요? 그새 잊으셨어요?”

하녀장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유모가 그 물음에 말문이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그 표정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집사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물었다.

“미겔 부인, 설마 공녀님을 혼자 둔 거요?”

“그, 그게 아니라요, 집사님. 간식을 드린 다음에 동화책을 보시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유모가 두 손을 꽉 오므렸다가 펴더니 이내 짜증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아주 잠깐인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공녀님이 아무것도 못 하는 갓난아기도 아니고. 로제도 가끔 자리를 비운다고요!”

“로제가 자리를 비울 때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죠. 이렇듯 개인적인 용무가 아니라.”

하녀장이 유모의 항변을 듣다가 끼어들었다. 그 말에 유모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그래서 지금 제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하녀장님? 한낱 하녀 따위를 저보다 높게 평가하시는 거예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미겔 부인. 그저 이런 식으로 아무 때나 공녀님을 홀로 두고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려던 것뿐이에요. 오늘처럼 로제가 외출해서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공녀님을 돌보는 사람이 유모 한 사람뿐이니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유모가 발끈하여 재차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집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선왕비전하께서 먼저 응접실로 들어가시지 않았소. 하녀장님, 들어가 보시오. 유모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공녀님에게 가 보도록 하고.”

집사의 깔끔한 정리 앞에 하녀장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응접실로 향했다. 유모가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씩씩대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쨌든 대공 저의 총괄 관리를 맡고 있는 집사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저택 밖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집사의 고개가 밖으로 향했다. 뒤이어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하인 하나가 다가왔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님!”

“아…….”

집사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이미 어쩔 도리 없다고 체념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나온 반응이었다.

“부디 전하의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그래야 그나마 선왕비를 봐도 덜 불쾌하지 않겠는가. 집사는 제 주인의 심기가 언짢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발길을 돌렸다.

* * *

“아니, 전하. 어떻게 로제 양과 같이…….”

집사는 제 주인의 심기를 살필 새도 없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헤이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로제를 본 탓이었다.

“마침, 시간이 맞았네.”

헤이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 뒤,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집사로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외출할 때 로제를 마차에 태워 가지만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그 말을 믿어보려 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갈 때도 마차에 태워 갔는데, 돌아올 때도 또 마차에 태웠다고? 그저 시간이 맞아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주인이 그랬단다. 무심하고 냉철하기 짝이 없는 대공이 한낱 하녀를 위하여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집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제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어? 로, 로제 양, 옷차림이…….”

그러고 보니 로제의 차림새가 확 바뀌었다. 아니, 옷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바뀌어 있었다. 집사는 로제의 화사한 옷차림을 보다가 눈을 크게 뜨고 헤이번을 보았다. 헤이번이 그 시선에 담긴 의문을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선물했네.”

“……예?”

“플리타의 선물을 사면서, 아이를 잘 돌봐준 것에 고맙단 뜻으로. 왜? 그게 문제라도 되나?”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집사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헤이번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 주인이 하는 일을 평가하는 건 그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할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지. 그 이상 의문을 품는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다.’

집사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자신이 보고해야 할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선왕비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뭐?”

헤이번이 마부를 시켜 마차 안의 짐을 꺼내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듯 싸늘해진 것만 같았다.

로제 역시 제 차림새가 어색하여 쩔쩔매다가 선왕비의 방문 소식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부 또한 플리타의 선물 등을 내리다 말고 움츠러들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선왕비가 여기는 왜…….”

헤이번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연 순간이었다. 저택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는 듯싶더니 이내 여자의 교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헤이번! 이제 돌아온 건가요. 기다렸잖아요. 플리타가 회복되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아이의 몸에 도움이 될 만한 약재를 챙겨 왔…….”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확인할 것도 없었다. 헤이번은 마치 안주인이라도 되는 양 저를 맞이하러 나오는 이자벨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은 온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이자벨라의 시선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서늘함의 대상은 헤이번이 아닌,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로제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로제를 보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너는 플리타의 전담 하녀 아니니? 로제, 라고 했었지?”

“안녕하셨습니까, 선왕비전하.”

로제는 이자벨라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짐짓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미처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 뭐니.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라서.”

“아, 예…….”

로제가 그 말에 입술을 꾹 깨물고는 제 옷자락을 매만졌다. 이자벨라의 금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득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눈빛과 달리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나저나 예상 밖의 모습이구나. 플리타가 병에 걸렸다고 하여, 너도 아이를 돌보느라 꽤 초췌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지난번보다 더 보기 좋아졌는걸? 게다가 플리타를 두고 외출까지 하다니. 아이의 상태가 정말 많이 좋아졌나 보네?”

“…….”

로제는 이자벨라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니, 대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녀와 제 신분의 차이가 그러했다.

“그래도 아직은 아이의 곁에 있어야지. 게다가 대공의 마차를 얻어 탔던 것 같은데 그 또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로구나. 누가 봤다가 괜한 말이라도 들리면 어쩌려고 그랬니? 대공과 한낱 하녀 따위가 함께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명예롭지 못한…….”

“그쯤 하시지요.”

그 순간,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이자벨라가 어리석은 하녀를 나무라듯 혀를 차며 말을 잇다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싸늘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외부인에 불과한 선왕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헤이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그저 하녀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당신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 반대입니다.”

“뭐라고요?”

“제가 로제에게 마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 경솔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로제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거겠죠. 미안하다, 로제.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는 냉랭한 투로 이자벨라에게 말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로제를 향해 사과했다. 로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해. 나 때문에 네 귀가 시간이 늦어져서 플리타가 많이 기다렸을 텐데.”

헤이번의 말을 듣던 이자벨라의 안색이 확 변했다. 즉, 그가 로제와 함께 어딘가를 다녀왔단 의미였다. 단순히 귀갓길에 그녀를 보고 마차를 태워 준 것이 아니라.

‘설마, 유모의 말이 사실이었어?’

이자벨라는 전날 저를 찾아왔던 플리타의 유모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늘어놓았던 황당한 이야기도 함께 기억 속에서 되살렸다.

「대공 전하와 그 계집 사이에 뭔가가 있습니다, 선왕비전하. 정말입니다. 그 여우 같은 것이 전하께 꼬리를 친 게 틀림없어요. 선왕비전하께서 오셔서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요.」

헛소리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니, 원래부터 거슬리는 구석이 있는 계집이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대공 저를 방문했다. 유모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제 눈으로 보기 위해서 말이다. 플리타가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였노라, 그렇게 명분을 내세우기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정말, 제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자벨라는 헤이번의 말에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는 로제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그러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눈에 거슬린다고?

그럼 치워버리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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