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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무엇일까. 헤이번이 느닷없이 고민에 빠져 미간을 긁적이는 순간, 로제가 저를 보는 그의 시선에 무안한 듯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는 몸을 돌려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이 드레스 가격이 얼마나 하는…….”
그 순간, 헤이번의 눈에 구두가 들어왔다. 로제가 드레스 자락을 든 덕분에 그 사이로 구두가 보인 것이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새까만 구두 말이다. 화사한 분홍색 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
헤이번이 그제야 답을 찾았다는 듯 외마디 소리를 내뱉더니 로제의 말을 가로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구두…….”
드레스 가격에 대해 대화를 나누려던 주인과 로제의 시선이 동시에 헤이번을 향해 모였다. 그는 로제의 구두를 가리켰다.
“구두도 그 드레스와 어울리는 것으로 추천해 주시죠.”
“저, 전…….”
“아! 그리고 모자나 목걸이, 뭐, 그런 것들도요.”
로제가 희게 질려 입을 열기에 앞서 헤이번이 덧붙여 말했다. 그와 동시에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호호! 그럼요. 걱정 마세요. 부인에게 딱 어울리는 것들이 바로 떠오르는걸요. 참, 그런데 목걸이는 여기 없어요.”
“목걸이는 없습니까?”
“이런저런 잡화는 취급하지만, 목걸이나 반지 같은 건 보석상에 가셔야 해요. 이 근처에 괜찮은 보석상이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주인의 말에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로제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 *
“전하, 이건 너무 과해요. 드레스랑 신발만으로도 분에 넘치는데…….”
로제는 보석상에서 나오자마자 쩔쩔매며 계속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헤이번이 구입한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반지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전하.”
“…….”
앞서 걷던 헤이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바람에 그의 뒤를 따라가던 로제가 황급히 멈춰 섰지만, 그의 등에 부딪치는 일을 피하지는 못했다.
“앗! 죄송합니다!”
그녀는 그의 등에 이마를 부딪치고는 비틀거리면서도 냉큼 사과부터 했다. 헤이번은 혀를 차며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야지. 넘어질 뻔했잖아.”
“아……. 예, 전하.”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헤이번이 잡아준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그러고는 손끝이 괜히 저린 것만 같아 손을 두어 번 오므려 쥐었다가 폈다.
“다친 데는 없나? 발목을 삐끗했다든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혀를 차며 한 말은 저를 탓하는 게 아니었다. 조심하지 않아 부딪쳤다며 불쾌해한 것도 아니었다. 외려 헤이번은 로제를 염려했다. 그에게 부딪치면서 혹여 발목을 삐끗했다거나 한 건 아닌지를 물으며.
그 다정함에 가슴속 어딘가가 술렁거렸다. 아니, 사실은 아까부터 자꾸만 가슴속이 술렁대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상점 주인에게 그와 부부로 오해를 받았을 때부터인지,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의 앞에 섰을 때부터인지, 그게 아니면 그가 제게 아름답단 말을 해 주었을 때부터인지.
그냥, 머리가 인식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헤이번을 보는 눈이 반응했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귀가 반응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뛰는 가슴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바보 같은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듯 그렇게 두근두근.
“다리를 약간 저는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헤이번은 로제의 다리를 살피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쉼터처럼 이용하는 분수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쌀쌀한 터라 분수대 근처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저쪽에 가서 다리 상태 좀 확인해야겠어.”
“예? 아니, 저는 괜찮……. 앗! 전하!”
로제가 헤이번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헤이번이 갑자기 그녀를 안아 든 탓이었다.
“저, 전하! 내려주세요! 정말 괜찮아요!”
로제는 그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헤이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수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아예 여기저기 소문을 낼 셈인가 보지, 로제? 그렇게 자꾸 불러대면 나를 몰라봤던 사람들마저 다 알아차릴 것 같은데.”
헤이번이 입꼬리를 올린 채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진담으로 알아들은 로제는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농담이긴 했으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하’란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헤이번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그 바람에 로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헤이번은 시선만 힐끗 내려 그녀의 정수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흠.”
그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헛기침을 하고는 분수대 앞의 벤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로제를 조심스럽게 그 벤치 위에 앉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려 했다.
헤이번이 그런 로제를 다시금 벤치에 앉게 한 뒤,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앉아 있어. 다리 상태를 보려는 거니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앗!”
로제는 그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는 사실에 기겁하여 다시금 일어서고자 했다. 하지만 헤이번이 그녀보다 먼저 움직였다. 바로 로제가 신고 있던 새 구두를 벗긴 것이다.
“이러면서 괜찮다고.”
헤이번은 그녀의 발목을 보고 혀를 찼다. 새 구두의 뻣뻣한 가죽에 쓸린 탓에 그새 발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는 다른 쪽 구두도 마저 벗긴 뒤, 재차 혀를 차며 로제의 발목을 감쌌다. 가느다란 발목은 손에 힘만 살짝 줘도 똑,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런 다리로 잘도 따라왔군.’
그는 열심히 제 뒤를 따라오며 선물이 과하다는 둥 쩔쩔맸던 그녀를 떠올리고는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로제가 끙끙거리다가 말을 건넸다.
“저, 좀 놓아주셨으면…….”
“응?”
“……제 발목요. 전하께서 잡고 계셔서.”
로제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작았다.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발목을 감싸 쥐고 있는 제 손이 보였다.
“아!”
헤이번은 황급히 그녀의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여인의 발목을 함부로 잡고 있다니, 따귀를 맞아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대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군. 정말 미안하다.”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설마 다른 사내가 네 발목을 잡아도 괜찮다고 할 셈인가?”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듣다가 문득 불쾌해져 다소 퉁명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을 듯 말 듯.
울 듯 말 듯.
‘……울 것 같다고?’
그가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순간, 로제가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럴 때는 따귀라도 힘껏 때려줘야죠.”
「당신은 발목이 참 예뻐. 하루 종일 당신 발목에 입을 맞추라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으으……. 방금 그 말, 상당히 변태적으로 들린 거 알아요?」
「하하! 그럼 변태 하지, 뭐. 당신 앞에서는 항상 변태로 있어도 좋겠어.」
「꺄악! 하지 말아요, 헤이번!」
「나랑 약속해, 로제. 혹시 나 같은 변태가 또 있어서 당신 발목을 노리면 있는 힘껏 따귀를 때려주겠다고.」
「흐음, 당신은 제외하고요?」
「당연하지. 설마 내 뺨을 때리려고? 흠, 좋아. 그러면 뺨 한 대에 발목 입맞춤 한 번. 어때?」
즐거운 추억이었다. 헤이번의 짓궂은 장난은 언제나 깊은 입맞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지고는 했다. 로제는 조금 전 그가 감싸 쥐었던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기억은 이제 저만의 것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저 손으로 잡은 것만으로도 실례했다며 사과하는, 낯선 남자일 뿐이었다.
로제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스쳤다. 그 순간, 헤이번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아주 듣기 좋은 말인걸.”
“예?”
“그렇게 해. 물론 그런 일이 없는 편이 낫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든지 때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
로제는 헤이번이 웃으며 한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을 뿐. 헤이번이 그 시선에 멋쩍은 듯 콧등을 찡그리더니 이내 말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 약이랑 붕대라도 사 가지고 올 테니.”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
로제가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라 그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헤이번은 이미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꽤 멀리 간 뒤였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낯선 남자일 뿐인데.
“왜 자꾸, 당신 모습이 보이는 건데.”
‘내가 알던 헤이번, 내 기억 속에만 남은 헤이번, 당신이 왜 자꾸만…….’
* * *
대공 저 앞에 왕실의 마차가 멈춰 섰다. 저택 안에서 소식을 들은 집사와 하녀장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직후, 마차 문이 열렸다.
“선왕비전하를 뵙습니다.”
마차 안에서 내린 이는 오랜만에 대공 저를 찾은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오만한 시선으로 제게 예를 표한 집사와 하녀장을 보더니 이내 미간을 모았다.
“헤이번은?”
“대공 전하께서는 용무가 있으셔서 외출하셨습니다.”
집사는 선왕비의 물음에 대답하며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그 대답이 못마땅한 듯 이자벨라의 입매가 비틀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고친 뒤, 아무렇지 않은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구나.”
이자벨라는 마치 자신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앞장서서 걸었다. 집사와 하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제 주인이 돌아와 그녀를 보고 불쾌해할 것이 뻔히 예상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선왕비를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삼키고는 이자벨라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