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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80화 (8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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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로제를 나무라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헤이번을 보았다. 중년 여자의 매서운 시선에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부인이 이런 칙칙한 걸 애당초 입지 못하게 했어야죠. 본인만 멋지게 입으면 그걸로 돼요? 부인한테 화사한 드레스도 좀 사 주고, 응? 적당히 야한 속옷 같은 것도 사 주면서 분위기도 내고, 그랬어야죠.”

“……저기, 다른 드레스를 보여주세요.”

로제는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서둘러 주인의 말을 막았다. 야한 속옷 운운하는 말까지 듣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조금 더 내버려 두었다가 무슨 말을 들을지 겁이 나기도 했다.

“음, 그럼 이 드레스는 어때요? 피부가 창백한 편이라 화사한 분홍색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면 붉은색 드레스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남편분이 보실 때 어느 게 더 나아 보여요?”

주인이 두 벌의 드레스를 펼쳐 보인 뒤, 헤이번을 향해 물었다. 헤이번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살폈다. 조금 전 플리타의 드레스를 볼 때보다 더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 분홍색 드레스 위에 망사를 덧씌워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마치 요정처럼 보일 텐데.”

주인이 호호,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주인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작 드레스를 살피는 헤이번의 표정은 탐탁하지 않아 보였다.

“조금 더 화려한 드레스는 없습니까?”

“이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찾으려면 귀부인들이 찾으시는 의상실에 가셔야 할 테지만, 그건 어려울 거예요. 아무리 돈을 싸 들고 가도 우리 같은 평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곳이잖아요.”

주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과 로제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가게는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었나 보다. 또한 헤이번을 그저 돈 많은 평민으로 본 모양이었고.

하기야 헤이번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을 보고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웬만한 귀족이라면, 그리고 그런 귀족을 상대하는 의상실 주인이라면 대공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으니 말이다.

“저기…… 공녀님의 옷은 다른 데에 가서 살까요?”

로제가 헤이번의 곁으로 다가가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헤이번이 불쾌해하면 어쩌나 싶어 그녀는 살짝 주눅이 든 상태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귀족이 다니는 의상실과 평민이 다니는 곳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귀족이 일반 평민들과 같은 곳에서 옷을 살 리 없으니 말이다. 고급 의상실에 가서 옷을 구입하거나 혹은 저택으로 사람을 직접 불러 옷을 맞춰 입을 터였다.

그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게 민망했다. 자신은 그저 가게에 걸려 있는 아동용 드레스가 깜찍하고 예뻤을 뿐이지만, 헤이번이 그런 저를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녀가 다시금 작은 소리로 사과하려는 찰나, 헤이번이 분홍색 드레스를 들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괜찮을 것 같군.”

“……예?”

“아이한테 선물할 드레스와도 잘 어울리고. 당신이랑 플리타랑 둘이 나란히 입으면 말이야. 이 드레스 모양도 약간 튤립을 닮은 것 같지 않아?”

헤이번은 조금 전 로제가 예쁘다고 했던 아이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주인이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럼요. 엄마랑 딸이랑 이렇게 나란히 입으면 정말 잘 어울릴 거예요.”

“하지만…….”

“플리타가 좋아하겠어. 당신이랑 비슷한 드레스를 입으면.”

그는 로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입어볼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곧바로 가봉도 해 드려요.”

나름대로 이 가게 안에서는 비싼 축에 속하는 드레스를 두 벌이나 한꺼번에 팔게 된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머나, 세상에. 아니, 어쩜 이렇게 예쁜 몸을 감추고 있었어요? 피부도 아기처럼 부드럽고, 가슴도 봉긋하게 모인 모양이 너무 예쁜데…….

“흐흠!”

헤이번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가게 안쪽에서 들려오는 주인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헛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면 그냥 도와주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말이 저렇게 많단 말인가. 더구나 밖에서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낯 뜨거운 말을 저렇게 서슴없이.

-혹시 남편이 밖에 나갈 때는 꽁꽁 감추라고 하는 거예요? 부인의 예쁜 몸은 나만 봐야 한다, 뭐 그런 거?

깔깔대며 웃는 주인의 말에 헤이번이 한숨을 내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탈의실 쪽에서 당황해하며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기는요! 딱 보니까 남편 소유욕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니까요. 남편은 옷을 멋들어지게 잘 차려입었는데, 부인은 차림새가 왜 그런가 했거든요. 이래서였지 뭐야. 예쁘게 차려 입혔다가 다른 사내놈들이 시선 줄까 봐 그런 거죠. 안 그래요?

-그게, 정말 아니라…….

-세상에, 이 허리 잘록한 것 좀 봐. 드레스 허리 부분을 많이 줄여야겠어요. 가슴 쪽은 반대로 좀 늘려야겠고. 아휴, 가냘픈 줄로만 알았더니 가슴은…….

“후우…….”

헤이번이 다시 한번 마른세수를 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수다스러운 주인과 함께 있는 로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분명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져 쩔쩔매고 있을 터였다. 아마 밖에 있는 제게 그 말들이 고스란히 들린 줄 알면 더더욱 얼굴을 붉힐 테고.

-남편이 많이 사랑해 주죠? 좋겠다, 정말. 남편 얼굴도 잘생겼지만, 몸이 아주 탄탄해 보이던데.

“콜록!”

로제에 대한 생각으로 잠시 웃음 짓던 헤이번이 저에 대해 말이 나오자 기침을 했다. 다시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헤이번은 또다시 아랫배 쪽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고는 당혹스러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낯 뜨거운 상상을 하고 말았다.

‘미쳤구나, 미쳤어. 헤이번 괸터스, 네가 제정신이 아니야.’

그가 제 목덜미를 문지르며 가게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순간이었다. 탈의실 쪽의 커튼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은 곧바로 소파로 돌아와 앉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

헤이번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로제를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로제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오더니 이내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때요? 부인분이 정말 아름답지요? 많은 손님들한테 드레스를 팔았지만,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에요. 가냘프면서도 몸의 선이 참 곱고 예뻐서 옷맵시가 아주 제대로 살아나더라고요.”

확실히 주인의 말대로였다. 그냥 주인이 보여주었을 때보다 로제가 입고 나니 드레스가 한층 더 화사해 보였다. 주인 역시 흥이 돋았는지 더욱 신나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화사한 것 좀 입히세요. 부인이 워낙 아름다워서 남 보여주기 싫은 남편분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예쁜 부인한테 그런 칙칙한 옷이라니요. 그건 아니죠.”

헤이번은 주인의 수다를 대충 흘려들으며 로제를 계속 쳐다보았다. 시선이 거의 그녀에게 붙박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공 저에서 늘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도, 외출을 하느라 땋아 내렸던 머리도 아닌, 그저 자연스럽게 푼 머리칼이 살짝 드러난 어깨 밑으로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머리칼 사이로 봉긋하게 올라온 가슴의 둔덕과 한 줌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가 엿보였다.

“크, 크흠.”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로제의 몸을 시선으로 훑어내리다가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로제가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그 헛기침 소리에 영문을 몰라 슬쩍 그를 보더니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이상하죠? 저한테는 안 어울…….”

그가 못마땅해서 헛기침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리고 로제는 그의 해명을 듣지도 않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시 탈의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헤이번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잘 어울려, 로제.”

“……예?”

로제가 탈의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어째서인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린 채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아름다워.”

“……!”

로제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드레스 앞섶이 살짝 파인 터라 드러나 있던 가슴 부위까지 붉은 물이 퍼지듯 빨갛게 물드는 게 티가 났다.

“호호, 아니, 누가 보면 신혼부부인 줄 알겠어요. 애도 다섯 살이나 된다면서, 그럼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일 텐데, 그런데도 그렇게 부끄럽고 막 좋고 그래요?”

주인이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입에 손을 대고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 말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헤이번이 다시금 로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귀족 여인들이 입는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는 아니었다. 보석 하나 달려 있지도 않았다. 비록 여인의 옷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니 말이다. 확실히 이곳이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곳임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질이 떨어지는 옷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민이 입기에는 고급스럽고 화사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로제가 원래 입고 있던 옷에 비하면 화사한 색이라 그런지 그녀의 얼굴도 더욱 화사해 보였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아가씨 같기도 하고.

로제를 보던 헤이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한 번 더 확인할 겸 로제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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