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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가 헤이번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의 연장이었다. 그는 그녀가 제 처분을 기다리듯 바짝 긴장하자 피식 웃었다.
“플리타가 너를 참 많이 좋아해, 로제.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
“…….”
“네가 아이의 전담 하녀가 된 뒤, 아이가 정말 많이 밝아졌어. 나도 그렇고, 다른 누구도 그렇듯 아이를 밝게 웃을 수 있도록 해 주지 못했는데 말이야.”
헤이번은 제 말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로제를 보았다. 감격스러운 듯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뭐,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자신의 말에 종지부를 찍듯 덧붙여 말했다.
“내 자식을 웃게 해 주는 이를 해고할, 그런 어리석은 아비가 있을까?”
또한 플리타에게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을 찾기도 힘들 터였다. 그러니 그녀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건 순전히 아비로서의 욕심이었다.
‘……정말 그뿐이야?’
그 순간,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 목소리였다.
‘저 여자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그게 전부야?’
‘……그럼, 뭐가 더 있는데?’
헤이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제 가슴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부정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로제가 조금은 먹먹해진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더니 어색함을 지울 대화 거릴 찾아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어딘가를 보고는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전하, 저기요!”
“……!”
로제가 언제 주저했던가 싶게 적극적으로 헤이번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놀란 헤이번이 제 소맷자락을 보았다. 그녀가 잡고 있는 겉옷 소매를 말이다.
하지만 로제는 그런 헤이번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재차 그를 잡아끌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저 가게에 걸려 있는 옷이 공녀님과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으세요? 가까이 가서 봐요, 우리.”
우리.
그녀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그의 심장에 쿵, 하고 부딪쳤다. 헤이번은 기다렸다는 듯 뛰는 심장을 주체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게 꼭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본래대로라면 불쾌해하고 크게 화를 냈어야 할 일이었다. 제 주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잡아끄는 고용인이라니. 누가 봤더라면 크게 놀랐을 터였다. 그 사람이 귀족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헤이번 괸터스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헤이번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미친 것일까. 그는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 그게 전부냐며 묻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멋대로였다.
제 가슴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한마디 던지고 숨어버린 목소리도. 그리고 고작 ‘우리’란 말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도.
……그 모든 게 어이없고 황당하면서도 불쾌하기는커녕, 되레 유쾌한 마음이 들어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제 자신도.
“저 옷이요, 전하!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데.”
로제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뀐 건 플리타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딱 어울릴 것 같은 옷을 발견한 기쁨이 앞서다 보니 자신이 헤이번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헤이번은 그녀에게 굳이 그것을 지적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로제가 가리킨 옷을 보았다. 헤이번의 입꼬리가 저절로 느슨하게 풀어졌다.
로제의 말대로 플리타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아동용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튤립 모양의 소매가 독특한 드레스였다. 리본과 프릴도 많이 달려 있어서 앙증맞아 보이기도 했다.
“……흠, 플리타가 좋아할 것 같기는 하군.”
헤이번은 플리타가 머리에 리본을 잔뜩 달았던 날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날의 변화 역시 로제에게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조금씩, 사소한 것들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들이 모여서 지금 같은 변화를 이끌어냈을 테고.
하기야 자신만 해도 그랬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아이의 선물을 산답시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상점을 기웃거리는 일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죠? 공녀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로제는 헤이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그저 웃으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 순간, 상점 안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나오더니 냉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이 옷을 보러 오셨나 보네요. 안으로 들어오셔서 제대로 구경하세요. 더 예쁜 옷들도 많답니다.”
상점 주인이 빠르게 두 남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남자의 옷차림은 한눈에 봐도 최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옷차림은 정반대였다. 나름대로 단정하게 입기는 했지만, 뭐랄까……. 시골에서 막 올라온 아가씨 같다고 해야 하나.
‘무슨 사이지? 부부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상점 주인은 나름대로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해 보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헤이번이 입을 여는 바람에 주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들어가 볼 건가, 로제?”
“예, 그러고 싶어요.”
로제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이번이 알았다는 듯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은 둘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잠시 깊숙이 밀어 넣은 뒤, 서둘러 그들을 안내했다.
“아이 옷을 보러 오신 거면, 음……. 혹시 따님의 선물을 사려고 오신 건가요?”
주인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헤이번이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그럼 따님이 몇 살인가요?”
“다섯 살이에요.”
주인은 고개를 돌려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나이를 말해주더니 가게 안에 걸린 다른 옷을 보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옷을 살피는 시선이 애틋했다. 제 자식의 옷을 고르는 게 아닌 이상, 결코 저런 시선일 수 없을 터였다.
‘부부로구나.’
주인은 로제의 시선에 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헤이번 쪽을 힐끔 보았다. 어느새 그가 로제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정했다.
‘부부 맞네.’
주인이 재차 제 생각을 확신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아이의 옷을 살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빠랑 엄마가 같이 선물 사러 나와서, 따님은 참 좋겠어요. 이렇게 다정한 부모를 두다니 말이에요.”
“예? 아, 그…….”
로제가 플리타의 드레스를 고르다가 느닷없이 부부로 오해를 받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저기, 그런 게 아니에요. 이분은…….”
“당신도 옷 좀 구경해 봐.”
하지만 헤이번이 먼저 그녀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고는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제가 저를 향한 헤이번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 전…….”
“플리타 옷만 볼 게 아니라 로제, 당신 옷도 좀 봐야겠어.”
“호호, 그러세요! 남편분이 옷을 사 주신다는데 어서 골라봐요. 그렇지 않아도 부인을 딱 보자마자 추천해 주고 싶었던 드레스가 몇 벌 있거든요. 잠깐만요!”
주인은 이때다 싶어 냉큼 로제에게 드레스를 보여주기 위해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단둘이 남게 되자 로제가 황급히 헤이번을 향해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하, 제 옷은 사지 않아도 돼요. 게다가 주인이 저와 전하를 부부로 오인하는데…….”
“부부로 오해받은 게 처음은 아니잖아? 미들피온에서 축제 때도 그랬고.”
“그때는 공녀님을 위해서 그랬던 거고요.”
플리타가 엄마 없는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로제가 작게 말하자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주면 되겠군.”
“예? 전…….”
로제가 헤이번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드레스를 여러 벌 가지고 나온 탓에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아이고, 뭘 그리 소곤소곤 대화하세요? 누가 보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인 줄 알겠어요. 두 분이 서로 쳐다보는 시선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저쪽에서 오는데 아주 단내가 진동하더라니까요. 저는 누가 설탕물이라도 한가득 쏟은 줄 알았지 뭐예요.”
“그게 무슨…….”
로제는 주인의 너스레에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히려 헤이번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드레스를 보여 주시죠.”
“아, 예! 우선 이 드레스부터 보여드릴게요.”
주인이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새빨개진 로제를 보며 작게 웃은 뒤, 가지고 온 드레스를 펼쳐 보였다.
“부인의 피부가 새하얘서 보라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요. 어깨도 적당히 드러나는 데다가 가슴 위쪽도 살짝 노출이 되어서…….”
“됐습니다.”
“아니요.”
주인이 자신 있게 설명하는 와중에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주인은 말을 하다가 그대로 멈추고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드레스 앞쪽을 가리키며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노출이 그렇게 심한 건 아니거든요. 그냥 남편분이 볼 때 흡족할 정도로…….”
“흐흠, 노출이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싶군요.”
헤이번은 저를 설득하려는 주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로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로제의 얼굴이 더욱 붉어져 손끝으로 건드리면 붉은 물이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젊은 부부가 의외로 보수적이신가 보네.”
주인은 서로 민망해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희한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로제의 등을 가볍게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지금 입고 있는 이런 옷은 정말 아니죠!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긴 분이 어쩜 이렇게 옷을 입어도 칙칙한 색으로만 골라 입었을까. 남편분 옷차림을 보면 그렇게 감각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이건 남편분 잘못도 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