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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쇼핑이나 할까.”
어리둥절해 하는 로제를 보던 헤이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꺼낸 말에 로제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하는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같이’ 쇼핑을 하자는 건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자신과 그가 같이 뭔가를 할 일이 없으니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헤이번은 그런 로제의 반응에 살짝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는 검지로 미간을 긁적이다가 괜히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음, 플리타의 병이 나은 기념으로 선물을 할까 해서 말이야. 물론 아이의 침실을 새로 꾸며주기는 했지만, 흐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그것과 별개로 내가 직접 아이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서.”
“…….”
“그런데 어린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아니, 애당초 어린아이를 위한 선물을 어디에 가서 사야 할지 모르겠더군. 그렇다고 다른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페드윈에게 물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나보다 더 모를 것 같아서…….”
말을 길게 할수록 헤이번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그녀에게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만 같았다. 자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빈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다. 플리타가 낫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또한 아이에게 직접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망함을 느끼는 것이었고.
「대체 어떤 여인이라서 대공이 이렇듯 안절부절못하며 시간만 확인하게 만드는 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문득 드벨론 백작이 제게 농담처럼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지금 자신의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그것 보라며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헤이번은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제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런데, 로제가 보기에는 얼마나 한심할지…….
‘그냥 따라오라고 했으면 될 텐데.’
자신은 그저 명령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누구에게 이렇듯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제 말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할 필요가 없었다. 헤이번이 거듭 제 한심한 모습에 탄식하려는 순간, 로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
헤이번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제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의 선물을 고르는 일이라는 걸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로제가 되레 민망한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플리타의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자고 한 것을 제멋대로 착각한 게 창피했다. 하지만 계속 창피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공녀님의 선물을 보러 갈까요, 전하? 음……. 생각하신 선물 품목이 있으신지요.”
“아, 아니. 그냥……. 글쎄, 뭐가 좋을까.”
로제의 물음에 헤이번이 더듬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진지하게 아이의 선물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를 보던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럼 일단 이것저것 둘러보고 결정하시는 건 어떨까요, 전하? 많이 구경하다 보면 공녀님께 선물하고 싶은 게 생기실 거예요.”
“음, 그럼 그렇게 하지.”
헤이번은 로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신기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금껏 봐 왔던 모습 중에 지금 그녀의 모습이 가장 생기 있어 보였다.
‘플리타의 선물을 사는 게 그렇게 신나는 걸까.’
그는 눈까지 반짝이며 앞서 걷기 시작한 로제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희한한 여자였다. 본인 선물을 사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어쨌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성공한 셈이었다. 웃음기 서린 눈으로 로제를 보던 헤이번의 눈빛이 이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난 뭘 하려고 로제를 설득한 거지?’
로제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드벨론 백작과의 티타임을 끝내고 급히 나와 마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주었던 장소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는 충동적으로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대로 그녀를 태우고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마차 안에 단둘이 로제와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다. 단둘이 있으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제 혼란의 정체를 아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그 약간의 시간이.
그런데 그게 썩 나쁜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렇듯 환한 표정의 로제를 보게 되었고, 또…….
그가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대공 전하?”
로제가 앞서 걷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의 거리가 서너 걸음 벌어진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플리타의 선물을 고른다는 생각에 너무 들뜬 탓에 그와 보조를 맞춰 걷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쭉 걸어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무안한 마음에 괜히 약 봉투를 한 번 고쳐 들고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헤이번이 그런 로제를 보며 피식 웃더니 이내 그녀의 손에 들린 약 봉투를 힐끔 보았다. 아직 팔이 덜 나은 터라 봉투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그 봉투, 이리 줘.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아니에요, 전하. 괜찮습니다. 무거운 것도 아닌걸요.”
로제는 헤이번이 제게 손을 내밀며 건넨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봉투를 더욱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헤이번은 로제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쉽게 그녀에게서 약 봉투를 가져갔다.
“전…….”
“여인에게 짐을 들게 하는 형편없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아서.”
헤이번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자른 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에 로제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인. 남자.
별다른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성별을 구분 짓는 단어에 불과했다. 그런 말을 의식하는 제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는데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로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는 사이에 헤이번이 약 봉투 안을 힐끗 살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약을 자주 받아오는군. 보아하니 꾸준히 먹고 있는 약인 것 같은데.”
소화제나 진통제처럼 잠시 먹는 약이라 하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한 달 내지는 두 달 분량의 약이라고 보면 적당할 듯했다. 헤이번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 아픈 데가 있나, 로제?”
“아……. 예, 저기,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제가 헤이번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원스럽게 하지 못하고 허둥대며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이의 선물을 고른다며 신나서 눈을 반짝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죄라도 추궁당한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게, 그냥…… 조금.”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처럼 소화 운운하며 둘러댈 수도 없었다. 소화제를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받아 올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병에 걸린 게 아닌 이상.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헤이번이 불쑥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내가 그런 걸 트집 잡아 해고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건가?”
“……!”
로제가 그 질문에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 반응을 본 헤이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맞나 보군.”
“아니요, 전하. 저는,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 로제. 너를 해고하는 일은 없을 거다.”
헤이번은 허둥대며 말을 이으려던 로제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로제가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그는 로제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불안.
그리고 초조.
그녀의 눈은 맑았다. 그렇기에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그게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래, 그녀의 눈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내비치는 게 싫었다.
그보다는 저를 향한 다정한 웃음을 보고 싶었다. 따스한 눈빛 깊숙이 감춰진 열기도…….
‘미쳤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로제가 그를 보다가 깜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세요, 전하? 머리가 아프신가요?”
로제의 손이 헤이번의 이마에 닿았다. 그는 괜찮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이마로 열기가 몰리는 것만 같았다. 로제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금세 표정이 흐려졌다.
“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전하. 오늘은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아니!”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듣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깜짝 놀라 저를 보는 시선에 멋쩍은 기분이 들어 한 걸음 슬쩍 물러섰다. 그제야 로제도 제가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던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손을 거두더니 덩달아 한 걸음 물러났다.
한 걸음. 그리고 또 다른 한 걸음.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헤이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약 봉투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조금은 풀죽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몸은 괜찮아. 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로제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덥지 않다는 듯 염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그 시선에 다시금 열이 오르는 걸 느끼고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나는 너를 해고할 생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