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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7화 (7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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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아직 나이 어려 많이 무서웠을 텐데, 참으로 기특하군요.”

“……아이와 함께 격리되기를 자청하였던 하녀가 큰일을 하였지요.”

헤이번은 노부인의 말에 로제를 떠올렸다. 전염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용기를 냈던 여인. 그녀가 없었더라면 과연 아이가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스스로 원하여 공녀와 함께 격리되었던 건가요? 그 충성심이 대단하네요. 대공께서 큰 상을 내리셔야겠습니다.”

“……예. 그래야지요.”

고작 500세테나 정도의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제 아이를 구해준 대가를 어찌 그 돈 몇 푼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두고두고 로제에게 그 고마움을 갚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제 생각을 들으면 그녀는 펄쩍 뛸 테지만 말이다.

“흐음……. 또 시계를 보는군요. 다른 약속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 그게 아니라…….”

헤이번이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노부인의 말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노부인이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는 장난스러운 투로 물었다.

“혹시 아리따운 아가씨와 데이트 약속이라도 했나요?”

“예? ……하하, 아닙니다.”

헤이번은 노부인의 질문에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노부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대공.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아마 저보다 더 통달한 사람이 없을걸요? 아시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폐하와 저 사이에 벌어졌던, 그 요란한 애정사를 말입니다.”

노부인의 말에 헤이번은 대꾸하는 대신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제 조부였던 당시 국왕과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고 작위까지 받았던 한 여인의 스캔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만큼 대단했으니 말이다.

“지금 대공의 모습이, 딱 그때 폐하의 모습과 비슷해요.”

“……예?”

난처한 웃음을 짓던 헤이번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노부인을 쳐다보았다. 노부인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아니 하시고 자꾸 제 주변을 맴돌기만 하셨던 그 시절의 폐하와 지금 대공이 너무나 닮아 있어요.”

“……!”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툭하면 나타나셔서 이렇게 부르고는 하셨죠. 드벨론 백작, 뭘 하고 있지? 드벨론 백작, 같이 말이라도 탈까? 드벨론 백작, 검토할 서류가 있는데 같이 보지. 드벨론 백작…….”

노부인의 말끝이 흐려졌다. 헤이번은 늙은 여인의 얼굴 위로 그리움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부인. 뭔가 오해하신 듯한데……. 저는, 그저…….”

헤이번은 달변가는 아니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조리 있게, 그리고 능숙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부인과의 대화 도중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리 어려운 대화도 아니었다. 그저 노부인의 오해에 아니라고 해명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아니라고요? 그럼 그 시계 보는 것부터 그만두고 아니라 해야지요, 대공. 저와 티타임을 갖던 중에 시계를 몇 번이나 본 줄 압니까?”

“……대부인, 그건.”

헤이번이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았다. 노부인은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눈까지 빛냈다.

“평소 뭘 봐도 무심하기만 하던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니란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지금 대공의 얼굴이 어떤지 거울을 가져다가 보여주고 싶을 정도예요.”

“……제 얼굴이 어떻기에, 자꾸 그리 놀리십니까.”

헤이번은 노부인의 말에 고개를 저은 뒤,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린아이가 선물 받기를 기다리며 잔뜩 설렌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답니다.”

“……예?”

“참 오랜만에 보는군요. 오래전 왕궁에서 봤던 어린 대공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그때, 폐하께서 대공에게 생일 선물로 말을 사 주셨지요?”

“아, ……루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헤이번이 노부인의 말에 제 애마를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왔던 애마, 루크는 조부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처음으로 갖게 된 말. 그래서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말을 보러 가자 했던 어린 날의 설렘.

……그런데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미 죽어버린 루크.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활발하고 장난기 많던 대공도 있고, 온화하고 어른스럽던 리비어스, 아니, 선왕 폐하도 계셨던. 그리고…….”

사랑하는 제 연인이었던 남자도 멀쩡히 살아 숨 쉬던.

헤이번은 노부인이 하지 못한 말을 알아차렸다. 노부인의 회색 눈 깊숙한 곳에 담긴 그리움을 엿본 탓이었다. 평생 부부가 되지 못했지만, 언제나 왕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평생 사랑한 남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조부이자 그녀의 왕이었던 남자.

그래서일까.

노부인은 헤이번을 대할 때 종종 귀여운 손자를 보듯 행동하고는 했다. 그 누구도 쉽게 그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지만, 노부인은 서슴없이 농담을 건네기도 하고 말이다.

하기야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가끔 그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대체 어떤 여인일까요?”

헤이번이 노부인에 대한 애처로운 감정에 잠겨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노부인은 다시금 장난기 서린 눈으로 그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대공을 이렇게 예전처럼 돌려놓은 여인 말입니다. 대체 어떤 여인이라서 대공이 이렇듯 안절부절못하며 시간만 확인하게 만드는 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만나면 내가 아주 칭찬해주고 싶어요.”

헤이번은 노부인의 말에 더 이상 아니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에 수긍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노부인, 드벨론 백작을 바라보던 제 조부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말도 안 돼.’

그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그 형체조차 불분명한 감정의 존재에 혼란을 느꼈다.

‘……내가, 로제를?’

* * *

「일단 약을 지어주기는 하겠지만, 약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로제는 치료사가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했던 비관적인 말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저었다. 저를 향한 동정 어린 시선 역시 머릿속에서 떨쳐내고자 했다.

누구를 찾아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어쩌다가 젊은 나이에 그런 병에 걸렸냐며 저를 동정하던 말과 시선 모두 닮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했다고 여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이 시린 건 여전했다.

조금만 더 살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 한마디에 어떻게든 매달려 보기라도 할 텐데…….

그런 다정한 거짓조차 제게는 허락되지 않는가 보다. 그저 냉혹한 진실만이 제 앞에 기다리고 있을 뿐.

하루하루 줄어드는 제 삶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라고.

……약 따위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고.

로제는 약 봉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꽉 오므려 쥐었다가 폈다.

팔딱팔딱 뛰는 맥박이 움켜쥔 손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런데 자신의 삶은 그 끝을 향해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그녀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제 운명을 이딴 식으로 결정 지은 절대자가 있다면 그를 붙잡고 소리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란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남은 시간을 온전히 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편이 낫다는 것도.

로제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마도 이 두려움은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심장이 멎는 그 순간까지, 자신은 몸서리를 치며 그 두려움과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녀는 제 아이를, 그리고 헤이번을 떠올렸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두려움 역시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살고 싶은 욕심이 점점 더 커지는 만큼, 두려움의 크기도 그와 비례하여 커지는 것이리라.

그러니 익숙해질 리 없다.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일 터.

‘살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저들과 조금만 더. 더 살고 싶…….’

로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질끈 감았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로제는 천천히 눈을 뜨고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

뭔가 하려던 일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로제의 낯빛이 그에 대한 걱정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로제의 앞에 가까이 다가온 헤이번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던가 싶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에 안심한 로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헤이번에 대한 걱정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점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저, 마차는…….”

바로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헤이번은 로제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따가 올 거야.”

“……예?”

뜻밖의 말을 들은 로제가 눈을 크게 떴다. 헤이번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처럼 나왔는데 볼일만 마치고 곧바로 돌아가기는 아쉽지 않나? 더구나 일주일 휴가를 포기하고 받은 반나절 외출인데,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돌아가는 건 말이야.”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니, 듣기는 했지만 도무지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게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자신이 그냥 돌아가는 게 아쉽다 할지라도 그게 헤이번과 무슨 상관이라고.

“같이 쇼핑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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