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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방황하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로제는 눈을 내리깔고는 죄 없는 치맛자락만 꽉 움켜쥐었다.
“내가 많이 불편한가?”
그 순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로제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들었다. 바짝 긴장한 모습이 흡사 경계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아,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금방이라도 달아날 것 같은 모습이면서 아니라 말하는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헤이번은 저를 향해 고개를 젓는 로제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 편히 가도록 해. 등도 좀 기대고.”
“……예.”
로제는 그제야 자신이 뻣뻣한 자세로 불편하게 앉아 있었음을 깨닫고는 억지로 힘을 뺐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려는 순간, 마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앗!”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로제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그녀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나?”
헤이번이 로제가 자신 쪽으로 넘어지려 하자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가 헤이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은은한 체향이 전해져 그의 코끝을 건드렸다.
인적 드문 시골의 길을 걷다 보면 바람결에 실려 전해지는, 들꽃의 향기 같은.
“……!”
순간, 헤이번은 그 향기에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아랫배 어딘가에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무의식 중에 그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로제가 몸을 뒤로 물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 ……괜찮아. 다친 데는 없나?”
헤이번은 가슴속에 밀려드는 아쉬움에 당혹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로제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손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랫배에서 시작된 열기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이번은 좀처럼 식으려 하지 않는 열기에 당혹감을 느끼다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마차의 작은 창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워, 워어.”
열린 창으로 마부가 말을 진정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말들이 얌전해지기를 기다리던 헤이번이 마부를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송구합니다, 전하. 마차 앞으로 길고양이 한 마리가 느닷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말들이 놀라서…….”
마부는 자칫 대공을 다치게 할 뻔했다는 생각에서인지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번이 그를 안심시키려고 손을 내저은 뒤,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고양이는 괜찮나?”
“예? 아아, 예! 말들 사이로 재빨리 달아났습니다.”
“……그럼 됐다. 다시 출발하도록 해.”
헤이번은 마부의 대답을 들은 뒤, 명령을 내리고 창을 닫았다. 그의 명을 받은 마부가 다시 말을 몰자 마차가 움직였다.
로제는 마차의 흔들림에 맞추어 살짝 좌우로 흔들리다가 이내 헤이번을 힐끗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마음을 놓고 헤이번을 바라보았다.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예전의 그처럼 다정한 남자였다. 함께 시골 마을에서 살던 때도 그는 그랬다. 잘 말려 보관해둔 고기를 물어가는 도둑고양이를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 봐, 로제. 하다못해 고양이조차도 인정한, 내 육포 만드는 솜씨를 말이야. 싹 다 가져가버렸잖아. 하하!」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농담하던 헤이번이 떠올랐다. 그를 보는 로제의 시선에 애틋함이 묻어났다. 바로 그때, 헤이번이 창밖을 바라보며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예?”
헤이번의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어서 마음 놓고 있던 로제가 느닷없는 질문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헤이번이 시선을 돌렸다.
“하도 쳐다봐서 뚫어질 것 같아서 말이지.”
그의 푸른 눈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로제는 헤이번이 제 시선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니, 저 혼자 어색하다고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제 어깨를 감싸 쥐었던 손과 그 체온을…….
로제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는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고는 창밖을 힐끗 보다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여기서 내릴게요, 전하.”
헤이번이 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더니 이내 마부석과 맞닿은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마차가 곧바로 멈춰 섰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제는 마부가 문을 열자마자 헤이번을 향해 인사를 한 뒤, 냉큼 마차에서 내렸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그가 또 숙녀를 에스코트하듯 먼저 내려 제게 손을 내밀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가만히 마차에 앉아 있던 헤이번이 로제의 뒤를 따라 갑자기 마차에서 내렸다.
“……?”
로제가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 근처에 뭐가 없는 것 같은데.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상점도 안 보이고.”
“예? 어, 저기……. 그냥.”
느닷없이 던져진 물음에 로제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당연히 이 근처에는 그런 상점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평범한 거리였으니까. 다만 이곳에 치료사가 있다는 게 그녀에게는 중요할 뿐이었다.
결코 헤이번에게는, 아니,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점이지만 말이다.
“하긴, 내가 실례했군. 숙녀분의 행선지를 함부로 물어보다니.”
또, ‘숙녀분’이란다. 로제는 마차를 탈 때 제게 손을 내밀며 농담처럼 건넸던 그 말을 다시 듣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헤이번이 저를 놀리는 건가 싶어 그를 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나한테 농담을 할 리 없잖아.’
그녀는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민망해져 무심코 제 볼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헤이번이 로제에게 다시금 말을 건넸다.
“언제쯤 볼일이 끝나지?”
“아…….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대략 한 시간 정도면.”
아마도 플리타를 두고 나온 게 신경 쓰여서 묻는 것인 듯했다. 로제는 그의 질문에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했다. 진료를 받고 약을 짓는 데에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흠, 그렇군.”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 공녀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응?”
헤이번이 로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바람에 로제도 덩달아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공녀님 걱정을…….”
“플리타를 왜 갑자기 걱정해야 하지? 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는 로제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로제 역시 헤이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녀님이 걱정되셔서 제가 언제 돌아가는지 물어보신 게 아닌가요?”
“……뭐?”
“제가 공녀님의 곁에 있지 않고 외출해서…….”
“아아, 이제야 알겠군.”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듣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이가 걱정되었다면 내가 애당초 일주일의 휴가를 주려 하지도 않았겠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냥, 같이 돌아가려고 물어본 거야.”
헤이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멍하니 그를 보던 로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재차 확인시키듯 입을 열었다.
“한 시간 후에 이곳에서 보도록 하지. 같이 돌아가자.”
“아, 아닙니다! 전하,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로제는 헤이번이 건넸던 질문의 의도를 그제야 깨닫고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어. 로제, 네가 어린애도 아니고. 당연히 혼자 돌아갈 수 있겠지.”
그는 당황해하는 로제를 보며 피식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도 그때쯤 일이 끝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러니 이왕 돌아가는 길, 같이 가도 상관없지 않나?”
“하, 하지만…….”
“기다리도록 하지.”
헤이번은 로제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도록 단호한 투로 말하고는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늦게 입을 열려 했지만, 마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던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든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 * *
“오늘따라 시간을 자주 확인하시는군요, 대공.”
“아……. 죄송합니다, 대부인.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헤이번은 무심코 시계를 보다가 노부인의 말에 곧바로 사과했다. 그러자 노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옆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부인의 티타임 시중을 들던 하녀가 냉큼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참, 공녀가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하늘이 돕고 신께서 보살펴 주셨나 봅니다.”
노부인은 하녀가 차를 따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돌렸다. 헤이번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부인께서 아이를 위하여 보내주신 약재,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신경 써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런 인사를 받기에는 민망하군요. 직접 문병조차 가 보지 못하였는데.”
노부인이 민망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헤이번이 그런 노부인을 보며 재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오셨어도 아이를 보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이라 별관에 격리되어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