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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5화 (7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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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장은 로제가 많은 돈을 받고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전하께서 수고하였다는 뜻에서 네게 일주일의 휴가를 주라 하셨다.”

“……휴가요?”

로제가 불편한 표정으로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뜻밖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녀장이 그녀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대답을 대신했다.

“아……. 아니요, 저는 휴가가 필요 없습니다. 하녀장님.”

로제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괜한 휴가라는 이름으로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반려해 주셨으면…….”

“전하께서 내리신 명이자 상이다. 그것을 거부할 셈이냐?”

하녀장이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제의 심정을 모르니 하녀장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제는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저, 그럼…… 딱 반나절만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고요.”

“로제.”

하녀장이 답답하다는 듯 로제를 불렀다. 로제는 어떻게든 하녀장을 설득하고자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정말이에요. 제게는 필요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녀장님. 휴가를 받는다고 해도 제가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시다시피 제게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이곳에서 공녀님의 시중을 드는 게 좋습니다.”

로제는 중간에 잠시 목소리가 잠기려던 것을 억지로 참고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하녀장이 쯧쯧, 혀를 차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련하구나, 로제. 남들은 휴가를 못 받아서 난리인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살다가 올라온 이들도 휴가를 받으면 밖에 나가 쇼핑을 하고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미련한 이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즐길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녀장은 거듭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이 로제의 말을 받아들였다.

정작 본인이 싫다는데 무엇을 더 어떻게 설득하겠는가. 싫다는데 휴가를 쓰라 하면 강요와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하녀장님.”

로제는 하녀장이 승낙을 하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기적으로 외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 기회에 미리 약을 잔뜩 받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럼 쉬도록 해라.”

하녀장이 할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로제가 그녀의 뒤를 따라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하녀장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수고했다, 로제. ……네가 공녀님의 곁에 있어 다행이구나. 고맙다.”

“……!”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녀장의 말투가 평상시 무뚝뚝하던 것과 달리 온화한 탓에 저도 모르게 놀란 것이다. 그런 로제의 표정에 하녀장이 머쓱한 듯 콧등을 찡긋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가, 감사합니다! 하녀장님!”

로제는 그런 하녀장의 뒤에 대고 저도 모르게 기뻐서 조금 더 크게 인사를 했다. 돈이나 휴가를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고작 수고했단 인사에 저렇게 기뻐하다니.’

하녀장은 제 뒤에 대고 감사하다 인사하는 로제의 목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가는 평소와 달리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 * *

“외출? 네가 나가겠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겠니? 대공 전하께서 직접 주신 휴가라던데. 안 그래?”

유모는 로제가 잠시 외출을 하겠다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비조로 받아쳤다. 로제는 그런 유모의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마저 밉살맞다는 듯 유모가 그녀를 흘겨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와 함께 몸을 돌렸다.

“네 마음대로 하렴. 뒷전으로 밀려나게 생긴 나한테 일일이 허락 구하는 거,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니?”

“유모님, 그렇지 않…….”

“됐다, 됐어. 딱 보니 어제 받은 돈으로 집을 보러 가는 모양인데, 여기서 이러고 시간 낭비할 필요 있니? 어서 가 보려무나.”

유모는 로제가 해명하려는 것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로제는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유모는 끝까지 사이가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허락은 받았으니, 빨리 다녀와야지.”

로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플리타를 두고 나가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지만, 약이 떨어지기 전에 받아놓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외출 준비를 위하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매일 입고 있던 하녀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외출복이라고 해 봤자 대단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옷 중에서 그나마 가장 깔끔해 보이는 갈색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짙은 잿빛 외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차림새가 달라져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풍겼다.

그렇게 외출을 위해 서두르던 로제의 귓가에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로제는 저택을 나서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택 밖에 마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였다. 길거리를 다니는 보통의 사륜마차가 아닌.

‘누가 온 건가.’

그녀가 나름대로 추측하며 조심스럽게 마차 뒤편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저택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헤이번이었다. 누가 저택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외출을 하는 모양이었다.

로제는 서둘러 옆으로 물러나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헤이번이 집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저택을 나서다가 로제를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차림새가 평소와 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하녀장이 오늘 아침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일주일 휴가 대신 반나절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는, 미련한 여자에 대한 말을.

‘그 외출을 오늘 하려는 건가 보군.’

헤이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한 뒤, 여전히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제를 불렀다.

“로제.”

“예, 전하.”

로제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한번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렸던 평소와 달리 하나로 길게 땋아 내린 다갈색 머리가 어쩐지 눈에 들어왔다.

“밖에 나가는 건가?”

“예, 전하. 저…… 하녀장님께 허락을 받았는데.”

“알아. 이미 다 들었으니 괜히 눈치 볼 필요 없어. 내가 준 일주일 휴가를 마다하고 고작 반나절 외출을 하겠다 한 것도 들었고.”

“저, 그건…….”

농담조로 건넨 헤이번의 말에 로제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뭐라 할 말이 없는지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는 그럼 이만…….”

로제가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같이 나가지.”

“……예?”

로제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이번이 대기 중인 마차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마차 타고 같이 나가자고.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데려다줄 테니.”

“아, 아닙니다, 전하. 그냥 걸어가도 돼요.”

헤이번의 제안에 로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공의 마차를 같이 타고 나가는 하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듯 재차 말했다.

“됐어. 데려다줄 테니 어서 타도록 해.”

“하, 하지만 전하.”

로제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치료사에게 가는 길인데, 이렇게 되면 그에게 제 행선지를 들킬 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헤이번은 재차 권유했다.

“……예.”

그녀는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인이 베푸는 호의를 계속 사양하는 것도 남들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저 때문에 그가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불편했고.

로제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킨 뒤, 마차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헤이번이 먼저 마차에 타기를 기다리는데,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로제가 그 손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재차 손을 내밀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로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먼저 마차에 타셔야…….”

“나를 예의도 모르는 불한당으로 만들 셈인가? 숙녀분이 우선이지.”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피식 웃었다. 맙소사. 로제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킨 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를 거부하고 먼저 마차에 타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그의 손을 외면한 채 자신이 먼저 마차에 탈 수도 없었다.

로제는 손을 꽉 오므려 쥐었다가 편 뒤, 그가 내민 손 위에 제 손끝을 살짝 올렸다. 그러자 헤이번이 정중한 태도로 그녀가 마차에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머나! 전하께서…….”

마차에 발을 얹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녀들 중 하나가 방금 전의 광경을 본 모양이었다.

로제는 마차에 타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쓸데없는 말이 퍼지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 순간, 헤이번이 마차에 올라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것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

마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플리타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와 자신이 대화할 일이 없는 건 당연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로제로서는 단둘이 탄 마차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시선을 돌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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