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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4화 (7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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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그러셔야죠. 유모님, 공녀님을 방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로제는 플리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유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모가 입술을 꽉 깨물며 로제를 노려보다가 대답 없이 몸을 휙 돌렸다.

“공녀님 모시고 얼른 들어가요.”

난처해진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조금 전 로제를 두둔해 주었던 베로니카였다. 로제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마워요.”

“뭘요……. 그냥, 대단하단 생각을 한 것뿐이에요. 내가 지금껏 좀 유치했단 생각도 들었고. 으음, 그러니까 앞으로는 같이 수다도 떨고 간식도 먹고 그래요.”

베로니카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덧붙인 뒤, 다른 고용인들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던 로제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대공 저에 온 이후 처음으로 받은 호의적인 태도였다.

“로제, 친구 생겼어?”

그 순간, 플리타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로제가 아이의 물음에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헤이번과 플리타, 두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만으로도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여겼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저를 냉대하고 따돌린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가슴속이 따스해지는 걸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외로웠던가 보다.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의 곁에 있어도, 어쨌든 저 역시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까.

때로는 대화를 나눌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런 시간이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방으로 가실까요, 공녀님? 어떻게 새로 꾸몄을지 궁금하시죠?”

“응! 궁금해! 우리 빨리 가 보자!”

플리타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로제가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기가 막혀, 정말!”

유모는 휴가를 떠나면서 챙겼던 짐을 풀다가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부글부글 열이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괜히 애꿎은 짐을 내던지며 화풀이를 하다가 한탄조로 말을 뱉었다.

“차라리 내가 자원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해 봤자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공녀는 기적적으로 완치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모는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500세테나라니. 내가 별관에 같이 들어갔더라면 그보다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었잖아!”

유모가 짜증스럽다는 듯 손에 잡힌 것을 내던졌다. 그녀가 아끼던 목걸이가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깟 싸구려 목걸이……. 자신이 놓쳐버린 보상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계집에게 500세테나를 주었으니, 그게 나였더라면 더 줬을 수도 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나서서 별관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별것 아니었던 병이 틀림없었다. 죽느니 어쩌느니, 치료법이 없다는 둥 하는 말은 그저 과장된 것이었나 보다. 이렇게 공녀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걸 보면. 그걸 모르고 괜히 겁부터 먹어서.

“이게 다 그 계집애, 로제 때문이야. 그게 사사건건 나를 방해하잖아. 하여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운 좋게 공녀를 구했다며 전담 하녀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식으로 대공의 눈에 들었다. 그러더니 이번에 이렇게 큰 상을 받은 것이고…….

“잠깐.”

유모는 미친 사람처럼 투덜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멈칫하더니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수상해.”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제 생각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보았던 대공과 로제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그사이에 더욱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체 공녀가 아픈 사이에, 자신이 대공 저에서 나가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러다가 그 계집애가 내 자리까지 노리는 거 아니야?”

유모는 무심코 말을 뱉고는 스스로 기분 나빠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그 계집애가 뭐라고……. 아니지, 아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자꾸 대공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라도 하면.”

유모는 본인의 입지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선왕비를 떠올렸다.

“그래, 일단 선왕비전하를 찾아뵙는 거야. 선왕비전하께서도 안 그러신 척하셨지만, 은근히 그 계집애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았잖아?”

유모는 뭔가를 계획하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코오오…….”

로제는 깊이 잠든 플리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새롭게 단장한 침실을 보고 신나서 방 안을 한참 동안 헤집고 돌아다니더니 지쳐서 잠이 든 터였다. 그 와중에도 꿈속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플리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뒤, 아이의 목 위까지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플리타는 잠들었지만, 자신은 아직 쉴 새가 없었다.

오히려 아이가 잠든 이 시간이 그녀로서는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플리타가 자는 사이에 짐 정리를 끝내야 하니 말이다.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 짐을 꺼냈다. 별관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 정리할 짐은 꽤 많았다. 하기야 느낌만으로 본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내며 보내야 했던 시간은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로제는 플리타의 옷가지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다가가 플리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아이가 쌔근쌔근 내쉬는 숨소리가 평화로웠다.

가래가 끓지도 않고, 앓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로제가 조심히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침실 문을 닫고 나온 로제가 제 방으로 돌아갈 땐 어느새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한결 마음을 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플리타의 저녁 식사 전까지 잠시나마 쉴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일까. 긴장이 뒤늦게 풀린 것인지 온몸이 욱신거리며 무거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참, 그러고 보니 약을 먹어야 하는데…….”

본관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느라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인 탓에 약을 복용해야 하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로제가 부랴부랴 약을 챙겨 먹으려고 제 가방을 열었다.

플리타의 짐 정리만 끝냈지, 제 짐은 아직이었다.

똑똑.

그녀가 가방 안에서 약 봉투를 꺼내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 누구세요?”

로제는 깜짝 놀라 꺼내 들던 약 봉투를 떨어뜨리고는 문밖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로제.

“앗, 하녀장님!”

로제는 본인임을 알린 하녀장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약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하녀장이 꼿꼿한 자세로 들어왔다.

“짐 정리를 아직 끝내지 못한 모양이구나.”

“예, 아직…….”

“흠…….”

하녀장은 흐트러져 있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침대 위에 활짝 열려 있는 가방을 보고는 시선을 고정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방 밖으로 비어져 나온 약 봉투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로제는 하녀장의 시선이 닿은 약 봉투를 보고 기겁하여 급히 치우려 했다. 가방 안에 넣는다고 했는데, 서두르는 바람에 제대로 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녀장이 그보다 먼저 손을 내젓고는 그녀를 막았다.

“됐다. 금방 나갈 테니 그렇게 부산스럽게 굴지 않아도 돼.”

“……예.”

로제는 약 봉투를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하녀장이 그녀를 보다가 무심한 투로 질문했다.

“어디 아픈 거니? 약을 먹으려던 참이었나 본데.”

“아, 저기, 그게…….”

하녀장의 물음에 로제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핑곗거리를 생각해두지 않은 터라 머릿속이 새하얘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하녀장은 그런 로제를 덤덤히 보더니 스스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아프지 않을 리가 없겠구나. 당장 팔도 그 모양이니……. 진통제 같은 것에 의존하지 말고 제대로 치료를 받도록 하려무나.”

“예, 하녀장님.”

로제는 변명할 말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하녀장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 로제를 향해 하녀장이 봉투를 내밀었다.

“받거라.”

“……예? 이게 뭔가요?”

뜬금없는 봉투에 로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녀장이 그새 잊었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대답했다.

“아까 전하께서 네게 내리라 하신 상이다. 500세테나가 맞는지 금액을 확인해 보려무나.”

“저, 그런데 제게는 너무 과한 액수의 돈이라…….”

로제는 다시금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하녀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 미들피온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 공녀님을 구하였고, 이번에는 아픈 공녀님을 홀로 돌보느라 수고하였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다. 그렇게 따지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지. 네가 겸양의 자세를 보이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공녀님과 관련된 문제라면 되레 그것이 공녀님과 대공 전하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로제는 하녀장 또한 헤이번과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하자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받았다. 하지만 평생 가져본 적 없는 거액의 돈이라 그런지, 아니면 제 아이를 구하고 받은 대가라 생각해서 그런지, 두툼한 봉투가 어쩐지 불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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