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유모는 플리타를 두 팔 벌려 안더니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마음 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더니 로제를 쏘아보며 타박조로 입을 열었다.
“로제, 너는 공녀님을 대체 어떻게 모신 거니? 제대로 모실 자신이 없었으면 나한테 맡겼어야지! 전하께 잘 보일 욕심에 제멋대로 나서더니…….”
유모는 로제를 나무라며 보란 듯이 혀까지 찼다. 본인의 행동을 변명하고 로제를 탓하고자 꺼낸 말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모의 의도와는 달리 그 말을 듣던 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레 유모를 힐끔거렸다. 하다못해 로제를 평소 별로 안 좋게 보던 하녀들조차 그랬다.
유모가 병이 전염될까 두려워 냉큼 휴가를 내고 대공 저를 떠났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공녀와 함께 별관으로 들어갈 사람을 뽑을 때, 로제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자원하려 하지 않았던 일도 모두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런데 유모는 그 모든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아니,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왜곡하여 말하고 있었다.
마치 로제가 제 욕심으로 공녀를 모시겠다고 자원했던 것처럼. 그 바람에 유모가 공녀와 함께 별관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그래놓고 로제의 불찰로 인하여 공녀의 몸 상태가 나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펄펄 뛰고 있으니, 사정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실, 플리타의 얼굴이 병에 걸리기 전보다 초췌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병에 걸려 호되게 앓았으니 어찌 얼굴이 좋을 수 있겠는가.
기적처럼 완쾌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터였다. 그런데 공녀의 얼굴이 야위었다며 트집을 잡으니, 누가 봐도 유모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또한 헤이번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유모를 쳐다보다가 기가 찬다는 듯 피식 웃었다. 워낙 작은 웃음소리였기에 그의 곁에 있던 집사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사는 제 주인이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닉.”
“예, 전하.”
집사를 부르는 헤이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헤이번이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유모를 보다가 집사를 향해 말을 이었다.
“로제에게 공녀를 돌본 공을 인정하여 상을 내릴까 하네.”
“……예, 전하.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집사는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당장 유모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말을 들은 탓이었다.
물론 로제가 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병에 걸린 공녀를 정성껏 돌봐 무사히 회복시켰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녀의 전담 하녀를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어쩐지 수상했다. 고용인들에게 무심하고 냉담하던 주인답지 않은 태도였다.
‘조금 전에 세 사람이 함께 들어올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공녀의 손을 나란히 잡고 오는 그들의 모습이 흡사 아이를 사이에 둔 부부처럼 보여서 당혹스러웠던 게 새삼 떠올랐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로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로제는 헤이번이 꺼낸 ‘상’ 이야기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플리타를 챙기느라 바빴다.
‘흠……. 대공 저에 안주인부터 먼저 들어와야 하는데. 이러다가 자칫 정부부터 들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더구나 하녀 출신의 정부라면 온갖 말도 많이 나올 텐데 말이지.’
집사가 작게 혀를 차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로제가 온순하고 착하다는 건 잘 아는 바였다. 유모가 눈엣가시처럼 여겨 핍박하는데도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 것을 보면 인내심도 강한 듯했다.
또한 공녀에게도 저렇듯 헌신적이니 딱히 나무랄 데가 없기는 했다. 그렇기에 하녀장도 은근히 로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주인의 ‘여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달랐다. 아니, 달라야 했다.
‘차라리 하녀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녀 출신의 정부라니. 집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주인의 ‘불명예’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바로 그 순간, 헤이번의 말이 다시금 이어졌다.
“로제에게 500세테나를 내리도록 하겠네.”
“……예, 예에?”
집사는 버릇처럼 주인의 명을 받들기 위하여 대답하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와 동시에 하녀장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고용인들, 그리고 유모까지도 전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500세테나, 말씀이십니까?”
집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 헤이번에게 되물었다. 500세테나라니. 그 정도의 돈이라면 수도 내에서도 평민들이 사는 구역에서 꽤 괜찮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만큼 큰 액수의 돈이었다.
“저, 전하. 그건 너무 과분…….”
로제 역시 멍하니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끼어들었다. 500세테나라니. 지나치게 많은 돈이었다. 한 달에 3세테나의 급여를 받는 것도 많은데, 500세테나라니.
아무리 아이를 위하여 상을 받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로제가 다시 한번 말을 열려고 하는 순간, 헤이번이 그녀를 보더니 시선을 돌려 집사와 하녀장을 향해 물었다.
“내 아이를 구했다. 그 공을 치하하여 상을 내리겠다는데, 설마 이게 많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딸이 고작 500세테나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어, 어찌 그렇겠습니까! 아무리 귀한 것을 가져다 댄다 할지라도 공녀님과 비교할 수 없지요. 제가 잠시 실수를 하였습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명하신 대로 당장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제, 어서 전하께 인사드리게나.”
“저, 하지만…….”
“어서 인사 올리도록 해라.”
듣고 있던 하녀장마저 로제를 재촉했다. 로제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쥔 채 헤이번을 보았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심하고 서늘한.
그러나 어째서일까.
그의 시선 깊숙한 곳에 웃음기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듯 당황하는 저를 보며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은 뒤,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앞으로도 플리타를 잘 부탁한다, 로제. 너를 믿겠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로제는 그의 말에 울컥하여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거액의 돈보다도 저를 믿겠다는 그의 말 한마디가 더 기뻤다.
“…….”
헤이번이 저를 향해 고개 숙인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플리타가 동그란 눈으로 로제와 그를 번갈아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뭔지 모르지만 제 방도 새로 단장했고 로제도 상을 받았다니까 신이 난 모양이었다.
“다들 그만 들어가지. 플리타, 너도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 병이 다 나았다고는 해도 당분간 푹 쉬어야 한다.”
“네에!”
플리타가 그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헤이번이 슬쩍 입꼬리를 올린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집사와 하녀장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남은 건 플리타와 로제, 그리고 유모를 비롯한 고용인들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10년 넘게 일하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할 돈을, 이렇게 한 번에 받는다고? 고작 아이 하나 며칠 돌본 대가로?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들어간다고 했지!”
그 순간, 고용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투덜댔다. 나름대로는 플리타의 귀에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춘 듯하지만, 로제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운도 좋지……. 솔직히 뭐 한 게 있다고 말이야. 별관 안에 틀어박혀 어린애 시중이나 조금 들고 그랬을 텐데.”
질시 섞인 목소리에 로제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니죠, 수잔.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그때 먼저 나서서 자원하지 그랬어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에요.”
“그, 그거야! 나는 공녀님 담당이 아니었잖아. 내가 담당 하녀였다면 당연히…….”
불평하던 하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방금 끼어든 다른 하녀에게 변명조의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앳된 얼굴의 하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말했다.
“별관에 들어갈 사람을 뽑을 때, 그런 걸 문제 삼지는 않았잖아요? 누구든지 자원하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걸 그새 잊었어요? 로제만 공녀님과 함께 가겠다고 했죠.”
“베로니카, 지금 그래서…… 나더러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고작 그 며칠 동안 공녀님을 돌봤다고 그 큰돈을 받는 걸 보고도 너는 아무렇지 않아?”
“뭐, 솔직히 좀 부럽기는 하죠.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부러워요.”
베로니카라 불린 하녀가 로제를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고, 로제는 용기를 내어 공녀님을 보살핀 덕분인데. 솔직히 대단했잖아요? 난 그때 공녀님 근처에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요. 다들 그랬던 거 아니에요? 그래서 유모님은 휴가까지 내셨던 거고…….”
“그게 무슨 소리니! 내가 그, 그런 이유로 휴가를 낸 줄 알아?”
하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모가 제 얘기가 나오자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변한 채 화를 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움찔거리더니 슬그머니 뒷전으로 물러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사람을 어떻게 보고.”
유모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유모의 말을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에 발끈한 유모가 다시 뭐라 하려는 순간,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아끌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로제, 나 방에 들어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