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2화 (7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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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랬잖아요. 꼭 나을 거라고. 꼭 나아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요. 로제랑 손잡고, 같이.”

“……아.”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아이를 별관으로 보내야 했던 날, 아이에게 건넨 말이었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고, 간절한 바람을 담은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플리타의 말을 듣자마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너는 그 말을 현실로 만들었구나.’

헤이번은 대견한 마음에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생글생글 웃더니 로제를 향해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로제 손도 잡고 갈래. 손잡아줘.”

플리타는 자그마한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러나 로제는 아이에게 냉큼 다가가지 못했다. 헤이번이 아이의 다른 손을 잡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하지, 로제.”

“……저, 하지만.”

로제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의 요구를 승낙한 헤이번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뭘 하느냐는 듯 눈짓을 했다.

“그렇게 되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상하다고?”

“남들 눈에는요, 전하. 괜한 오해를 받을까 봐…….”

로제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아이의 손을 각각 잡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흡사 부부 같지 않겠는가. 아이까지 포함하여 단란한 세 식구의 모습 같기도 할 테고.

그녀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민망한 터라 애매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알아차릴 것이라 여긴 채.

“오해라니? 무슨 오해를 말이지?”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헤이번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바람에 로제가 더욱 당황하여 입을 달싹였다.

“그, 그러니까……. 그게, 음…….”

피식.

바로 그때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아주 작게 피식거린 소리였기에 자칫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로제는 그의 웃음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전하?”

그녀는 당황하여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로제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보았다. 그가 미처 지우지 못한 웃음의 흔적을.

‘……설마, 나를 놀린 거야?’

로제의 녹색 눈이 깜빡였다. 헤이번이 방금 저를 놀리느라 천연덕스럽게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알던 헤이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지 않은가.

“흠흠. 가지.”

헤이번이 자신을 응시하는 로제의 시선에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몸을 돌렸다. 그러자 플리타가 재촉하듯 로제를 향해 손을 거듭 내밀었다. 로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잡았다.

“히힛.”

플리타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로제가 다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 전하, 짐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요. 저는 남아서…….”

“다른 이들에게 가지고 오라 하면 돼.”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곧바로 잘랐다. 플리타 역시 로제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헤이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플리타도요.”

“……플리타?”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어 헤이번이 미간을 좁혔다. 플리타가 창틀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쟤요. 플리타. 아빠가 선물해준 화분요. 쟤도 데려가야 해요. 하인들한테 꼭 챙겨 오라고 말해야 해요.”

“아, 으음……. 내가 선물한 건지 어떻게 알았지?”

헤이번이 창틀에 놓인 화분을 보더니 어색한 투로 질문했다. 플리타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알려줬어요. 로제는 다 알아요. 모르는 게 없는걸요.”

“……그렇구나.”

헤이번의 푸른 눈이 로제에게 향했다. 로제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일인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마치 과거의 추억을 기억한 것처럼. 그래서 저 또한 그를 알아본 것처럼.

……그냥, 그런 것처럼.

* * *

“멍멍!”

본관의 1층 홀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강아지가 쏜살같이 달려와 제 어린 주인을 반겼다.

“하양아!”

헤이번과 로제의 손을 잡고 다가오던 플리타는 강아지를 보고는 금세 반색하여 그들의 손을 놓고 강아지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곧바로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방종하게 행동했단 생각을 한 탓이었다.

“쓰다듬어 주려무나. 녀석이 너를 많이 그리워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강아지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어린 주인을 향해 요란하게 꼬리를 흔들고 드러누워 배를 뒤집기를 반복하는 강아지를 말이다.

“……하양아.”

플리타는 그런 헤이번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마음을 놓은 듯 다시 돌아서서 강아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멍멍!”

헤이번이 아이와 강아지가 서로 뒤엉켜 노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제 역시 플리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그보다 두어 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병에 걸렸다가 기적처럼 회복하여 돌아온 공녀를 반기기 위하여 양쪽에 일렬로 서 있던 고용인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헤이번과 함께 플리타의 손을 잡고 들어온 저를 보고 하는 말인 듯했다.

“크흠.”

그때, 집사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앞에서 수군대는 고용인들을 질책하는 의미가 담긴 헛기침이었다. 그 소리에 다들 입을 꾹 다물자 침묵이 찾아들었다. 강아지가 헥헥대며 플리타를 반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공 전하, 공녀님의 완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집사의 인사에 이어 하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고용인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플리타가 강아지와 놀다 말고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헤이번의 곁으로 다가왔다. 강아지 역시 제 주인을 따라 꼬리를 살랑대며 따라왔다.

“공녀님, 돌아오시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집사가 그런 플리타를 향해 무릎을 구부려 눈높이를 맞추고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플리타는 집사의 늙은 얼굴을 빤히 보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집사 할아버지.”

아이의 작은 인사에 집사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그는 미소를 지은 뒤, 다시금 플리타를 향해 말을 이었다.

“공녀님의 완쾌를 축하하는 뜻에서 침실을 새롭게 단장하였답니다.”

“……예?”

플리타가 강아지를 품에 안으려고 꼼지락거리다가 집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사는 헤이번을 힐끗 보고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 전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셔서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아주 혼쭐이 났지요.”

집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농담까지 덧붙였다. 그만큼 공녀의 병이 다 나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플리타만큼은 아닐 터였다.

아이는 집사의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다시피 하여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와아! 고맙습니다.”

플리타가 감탄사를 내뱉다가 감사 인사를 깜빡했다는 듯 두 손을 배꼽 위에 올리고 인사했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아이와 헤이번을 바라보았다.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아이를 위하여 방을 새로 꾸며주었다는 걸.

하긴, 별관에서 본관의 사정을 알 수 있을 리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겨우 그런 이유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미리 생색을 내고 싶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리하였을 것이다. 침실 앞에 플리타 꽃이 심어진 화분을 가져다 놓았던 것처럼, 얼마든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화분을 가져다 놓은 사람이 본인이란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가 먼저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덤덤한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본인이 한 일을 쑥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예전의 그를 보는 것만 같아서.

로제가 코끝이 시큰해져 손으로 누르는 찰나였다.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로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밝게 웃음 짓던 플리타의 얼굴이 흐려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전하! 허억, 헉…….”

어디서부터 달려온 것인지 유모의 모습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단정하게, 숙녀답게 행동해야 한다며 플리타를 몰아치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미겔 부인, 휴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 순간, 하녀장이 미간을 모은 채 끼어들었다. 유모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그 말에 정색을 했다.

“공녀님께서 아프신데 제가 어떻게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어요? 부득이하게 개인적인 일로 인해 휴가를 며칠 내기는 했지만, 그동안에도 우리 공녀님 혹여 더 악화되시면 어쩌나 싶어 밤잠을 설쳤답니다. 아시잖아요? 공녀님을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제 품에 안아 키운 것을요. 어떤 어미가 제 자식이 아픈데 마음 편할 수 있겠어요?”

유모는 손수건을 들어 제 눈가를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몸을 휙 돌려 플리타에게로 다가갔다. 플리타가 그런 유모를 보고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로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를 꺼리는 아이의 행동에 유모가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억지로 표정을 풀고는 이내 감격한 얼굴로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우리 공녀님, 이렇게 무사히 회복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 무서운 소식이라도 올까 싶어 매일 두려움에 떨었답니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아이고, 얼굴 야위신 것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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