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1화 (7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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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공이 컸지. 진심으로 고맙네.”

“아이고, 아닙니다. 전하께서 전적으로 도움을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주치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말은 단순히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헤이번의 도움을 받은 게 많았다. 왕족만이 출입할 수 있는 왕실 도서관에 한시적으로나마 출입을 허가받았던 것도 그렇고, 왕궁의를 포함하여 왕국 내에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치료사들과 던퍼스 병에 관하여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그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듯 단기간에 성과를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던퍼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고 이렇듯 완치된 환자의 사례도 생겼으니, 이 땅에 사는 모두가 대공 전하의 은혜를 받은 셈입니다.”

병은 귀하든 천하든, 늙든 젊든, 그 어느 것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법이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아도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제 공로를 내세울 마음이 없었다. 그는 주치의의 말에 피식 웃은 뒤, 침대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주치의가 냉큼 자리를 비켜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플리타가 일어나 앉더니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빠.”

“그래, 플리타.”

“저, 다 나은 거예요?”

“그래.”

아이의 물음에 헤이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그 모습에 울컥하여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제 코끝을 눌렀다. 하지만 플리타는 여전히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으음, 그럼…….”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 이제 이거 안 해도 돼요?”

플리타가 말한 것은 얼굴을 가린 손수건이었다. 헤이번이 주치의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주치의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공녀님. 이제 다 나으셨는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리타가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아래로 내렸다.

“후아…….”

아이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 큰 어른도 하루 종일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으면 답답할 텐데, 어린아이가 지금껏 잘 참아주었다.

그는 플리타를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풀었다.

뒤이어 주치의도, 로제도 손수건을 풀었다. 플리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정말 다 나았다는 걸 이제야 실감한 듯한 표정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녀님. 이제 별관에서 나가셔도 됩니다.”

주치의 역시 플리타를 기특하다는 듯 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손수건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니, 이곳에서 벗어나 본관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사실에는 또 오죽 기뻐할까 싶어 꺼낸 말이었다.

“어……. 으음, 네에.”

하지만 플리타는 주치의의 말을 듣자마자 흠칫하더니 마치 내키지 않는 듯 말을 길게 끌었다. 그 반응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수고했네. 이만 가 봐도 좋아.”

그 순간, 헤이번이 주치의를 향해 말을 돌렸다. 주치의는 플리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헤이번과 플리타, 그리고 로제뿐이었다.

“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

헤이번은 주치의가 나간 뒤, 플리타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플리타가 그의 물음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물론이지.”

“사실은…… 돌아가기 싫어요.”

플리타는 머뭇거리며 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것은 아이에게 큰 변화였다. 언제나 제 생각이나 바람을 말하기보다는 남들의 눈치를 살피며 꾹 참고 살았던 아이가 돌아가기 싫다고 제 속내를 솔직히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그 변화가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기꺼웠다. 하지만 헤이번은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지?”

헤이번의 그런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플리타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여기서는요. 로제랑 같이 빵도 만들고 시럽도 바르고, 그랬거든요. 같이 소꿉놀이도 하고요. 침대에 엎드려 그림책을 보면서 쿠키를 먹어도 혼나지 않았어요. 쿠키 부스러기가 떨어진다고 유모는 야단을 쳤었는데, 으음, 로제는 이곳에서만큼은 뭐든지 제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된다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던 헤이번이 로제를 쳐다보았다. 로제가 난감함에 잠시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공녀답지 않게, 아이를 버릇없이 가르쳤다며 뭐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것을 각오하고 행동한 것이었다.

물론 아이의 교육 차원에서 볼 때, 제 방식은 나쁘다고 할지 몰랐다. 더구나 대공가, 고귀한 핏줄에게는 더욱 말이다.

그러나 로제에게 플리타는 그저 몸이 아픈, 제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이곳에서마저 ‘공녀’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억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나으려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야 하니까.

아니, 그런 걸 떠나서도 플리타에게 ‘아이답게’ 사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저 해맑게 지내도록.

헤이번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로제를 마주 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플리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다면, 본관에 가서도 그렇게 하려무나. 빵을 만들고 싶다면 그 또한 허락하마.”

“……!”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플리타뿐만 아니라 로제까지도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그는 저를 향한 두 쌍의 닮은 시선을 느끼며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빵을 만드는 걸 자주 해서는 안 된다. 이 주일, 아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헤이번은 제 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 하던 아이가 ‘이 주일’이란 말에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걸 보고 일주일로 말을 고쳤다. 그러자 플리타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아!”

반짝이는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비로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저를 보니 말이다. 헤이번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당부조로 말을 꺼냈다.

“다만 주방에 가서 빵을 구우며 놀고 싶다면, 주방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걸 잊지 말아라. 주방은 네 놀이터가 아닌 주방장의 공간이니……. 아니다. 그럴 게 아니라 차라리 별관을 네게 줄 테니, 이곳을 놀이터 삼아 노는 편이 낫겠구나.”

“헉! 정말요?”

플리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이번은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저의 모든 곳이 제게 속해 있고 자신의 관할 아래에 놓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곳을 담당하는 자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제게는 별 의미 없는 공간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일하는 곳이니까.

“좋아요! 별관이 더 좋아요! 그치, 로제?”

플리타는 그의 말에 손뼉을 연이어 치며 기뻐했다. 기쁨을 온전히 드러내는 아이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눈을 반짝이며 얼굴이 상기되어 저를 향해 박수를 치는, 그 모습이.

아이가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제게도 전해진 것일까. 헤이번은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뿌듯해지는 속을 애써 진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가도록 하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에!”

플리타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아쉬움을 싹 잊은 듯 냉큼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헤이번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작은 손이 꼭 감싸 쥔 손가락이 따뜻했다. 열이 올라 뜨끈뜨끈하던 아이를 품에 안고 별관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다시 이렇게 아이와 함께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나을 수 있다, 그리 말했지만 말이다.

사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작은 아이가 이겨낸 것이다. 그 무서운 병을.

그는 새삼 감격에 젖어 아이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는 헤이번과 플리타가 맞잡은 손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로제.”

“예, 전하.”

“수고했다.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무엇을 했다고요.”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겸양의 말을 했다.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아이를 구했다. 벌써 세 번이나.”

물에 빠졌던 아이를 구했고, 샹들리에 밑에 깔릴 뻔했던 아이를 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염병으로 죽을 뻔한 아이를 구한 것이다.

주치의는 플리타가 이렇듯 완쾌한 것을 두고 기적이라 하였다. 또한 하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걸 그저 기적이나 하늘의 도움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중 대부분은 아이의 강한 의지, 그리고 아이가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해 준 로제의 헌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헤이번, 자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아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전하.”

로제가 그의 치하하는 말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플리타가 배시시 웃더니 입을 열었다.

“참, 나 로제 손잡고 가야 하는데.”

“……?”

헤이번과 로제가 아이의 말에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헤이번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빠가 그랬잖아요. 꼭 나을 거라고. 꼭 나아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요. 로제랑 손잡고,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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