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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70화 (7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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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심각한 문제인가 싶어 페드윈의 표정 역시 진지해졌다. 집사도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호위 기사를 불러오라 하여 말을 전하기만 했을 뿐, 제 주인이 무슨 일로 그를 부른 건지는 알지 못해서였다.

“플리타.”

“……예?”

두 눈에 힘까지 주고 있던 페드윈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집사 또한 찻잔을 정리하다가 순간 놓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집사는 떨어뜨린 찻잔을 황급히 수습했다. 헤이번이 괜찮단 뜻으로 손을 내저은 뒤, 부연 설명을 했다.

“아이가 아니라, 들꽃을 말하는 거네.”

“……들꽃이라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페드윈이 눈을 굴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검밖에 모르는 사내가 들꽃 이름을 어찌 알겠는가.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조금 더 설명을 해 주었다.

“들꽃 중에 플리타란 이름을 가진 꽃이 있다고 하더군. 그 꽃을 가져와 주게.”

“……예?”

“이왕이면 정원 한쪽을 그 꽃으로 심어놔도 괜찮겠군.”

헤이번은 황당한 눈으로 저를 보는 집사와 호위 기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로제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플리타가 보였다. 침대 옆에 앉아 잠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쌔근쌔근.

플리타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도 거의 내린 상태였다.

“……아, 감사합니다.”

로제는 누구를 향한 감사 인사인지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플리타의 상태가 갑작스럽게 악화되었던 날 이후, 며칠이 지나갔다. 그사이에 아이의 병은 많이 호전되었다. 비관적인 결말을 예측하던 주치의가 당황해하며 이를 두고 기적이라 불렀을 만큼 말이다.

‘고마워, 아가. 씩씩하게 잘 이겨내 줘서.’

아직 섣부른 예단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플리타가 완쾌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일어나기 전,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으니 수프 외에도 아이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도 될 터였다. 물론 병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가야겠지만 말이다.

‘뭐가 좋을까. 아침이니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음식이어야 할 텐데…….’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로제가 문득 멈춰 섰다. 침실 바로 앞에 놓인 뭔가를 본 그녀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이건…….”

로제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는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녀는 플리타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침실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화분을 보다가 쪼그려 앉았다. 그녀를 반기기라도 하듯 작은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이건, 플리타잖아.”

로제는 말문이 막혀 손으로 잠시 입을 막았다가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플리타.

바로 이 꽃의 이름을 따서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짓고 싶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랐기에. 제 아름다움을 뽐내며 화려하게 피는 꽃들도 많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새도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헤이번이 아이에게 플리타란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설마, 들었던 걸까?”

로제는 빨간 꽃잎을 조심조심 만져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아이에게 이름의 뜻을 말해주었던 게 기억났다.

아이의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바로 그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이에게 그 이름과 관련된 뜻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너도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고.

한겨울 추위에도 씩씩하게 꽃을 피우는 그 생명력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전에 본관으로 돌아갔…….”

로제는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다음 날 침실 밖에 장작이 가득 담긴 양철통이 놓여 있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화분이 놓인 곳을 다시 보았다.

……그날, 장작이 담긴 통을 두고 간 자리와 같았다.

‘……당신이었군요, 헤이번.’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헤이번이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장작을 가져다주라고 지시를 한 줄로만 알았다. 그가 직접 장작을 가져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으응, 로제…….”

잠깐 꽃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꽃을 본 듯했다. 어느새 잠에서 깬 플리타가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쪼그려 앉아 있던 로제를 향해 자박자박 다가온 것이다.

“아, 공녀님! 일어나셨어요? 이런, 어쩌죠? 아직 아침 준비를……. 아니, 그보다 아침 공기가 차가운데 숄이라도 걸치셔야…….”

로제가 당황하여 허둥지둥 일어섰다. 하지만 플리타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거 뭐야?”

“예? 아…….”

로제는 아이가 화분을 가리키며 질문하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서 문 앞에 두고 가셨어요.”

“어? 아빠가?”

“예, 전하께서 공녀님을 위해서 준비한 선물이에요.”

“……우와.”

플리타가 작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더니 아주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하지만 아이가 느낀 기쁨은 그보다 훨씬 컸다. 아이의 얼굴이 발그레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나 볼래! 나!”

“일단 안으로 다시 들어가시고요, 공녀님. 아침 공기가 차가워서 몸에 안 좋아요.”

“그치만.”

늘 로제의 말이라면 순순히 듣던 아이답지 않게 조급함을 드러냈다. 로제가 그런 플리타를 보며 웃고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에 들어가시면, 제가 이 화분의 비밀을 알려드릴 텐데…….”

“비밀?”

플리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제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곧바로 몸을 돌렸다. 로제가 작은 화분을 품에 안아 들고 아이의 뒤를 따랐다.

들꽃 한 송이가 심어져 있는 화분은 크기도 작을 뿐만 아니라 그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한 팔로도 충분히 들 수 있었다.

‘혹시 내 팔 상태를 배려해서…….’

그녀는 무심코 생각을 잇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플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로제, 뭐 해? 빨리 와. 얼른 비밀 얘기해 줘.”

“예.”

로제는 아이가 화끈거리는 뺨의 열기를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테이블로 향했다. 플리타가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금 다가오더니 그녀가 테이블 위에 화분을 올려놓는 걸 도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 화분의 비밀이 뭐야?”

“……음, 공녀님. 며칠 전에 제가 해 드린 얘기 기억하시죠?”

“무슨 얘기?”

“공녀님 이름요.”

“응! 나 기억해. 내 이름, 꽃 이름이랑 똑같다고 했잖아. 겨울에도 잘 자란다고. 나도 그렇게 튼튼하게 자라라고, 아빠가 지어준 이름.”

플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처럼 말했다. 로제가 말한 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로제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는 화분에 심어져 있는 꽃을 가리켰다.

“이 꽃이, 바로 그 ‘플리타’예요.”

“……어?”

플리타가 로제의 말에 귀를 쫑긋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말했다.

“공녀님이랑 같은 이름을 가진 꽃, 보고 싶다고 하셨죠?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예요.”

로제의 말에 플리타가 눈을 깜빡거리는 듯싶더니 다시 꽃을 보았다.

안녕! 나야, 플리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 속에서 작고 빨간 꽃이 그렇게 인사를 건네듯 당당하게 저를 뽐냈다.

“……플리타?”

“예, 공녀님. 추운 날씨에도 잘 자라는, 아주 강하고 씩씩한 꽃이에요. 보기에는 이렇게 작고 약해 보이지만요.”

로제의 말을 들으며 들꽃을 보는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반짝였다.

“강하고, 씩씩한…….”

아이는 그녀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리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고는 로제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럴래. 나도 얘처럼 강하고 씩씩해질 거야. 나도 플리타니까. 내 이름도 플리타니까.”

“……물론이죠, 공녀님. 공녀님은 당연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로제는 아이의 다짐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온전히 믿는 시선에 플리타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 * *

주치의가 플리타를 꼼꼼히 살폈다. 하다못해 아이의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손바닥, 발바닥까지 전부 확인했다.

아이의 몸을 뒤덮었던 붉은 발진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를 괴롭히던 열도 내려 정상 체온이었고, 기침 또한 가라앉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주치의는 플리타의 명치 아랫부분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떠십니까, 공녀님?”

“하나도 안 아파요.”

“아주 조금이라도 아프시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정말 하나도 안 아픈데.”

……꼬르륵.

아이의 배 속에서 소리가 났다. 복통으로 인한 게 아닌, 먹을 것을 달라는 소리였다. 로제가 두 손을 모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서 있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간식을 드셔야 할 시간이라…….”

“허허.”

주치의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배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감격한 표정으로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축하드립니다, 대공 전하. 공녀님의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정말인가?”

헤이번은 기쁨을 억누르며 한 번 더 확답을 받고자 물었다. 그러자 주치의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던퍼스 병의 증세가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허허, 정말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 병이 이렇게 치료가 되다니…….”

“자네의 공이 컸지. 진심으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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