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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지위마저 버린 채 택했던 여자. 그리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기.
그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헤이번은 침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누군가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장작이 담긴 통을 내려놓은 뒤, 당혹감이 서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저도 모르게 떠올린 풍경 속에서, 여자는, 플리타의 생모는…… 로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거지. 아이가 아픈데,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아이가 아픈 걸 떠나서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헤이번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도 본인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그 원인은 로제였다는 사실도.
바로 그때였다.
침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이 나오면서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바람에 침실 안의 소리가 고스란히 복도로 새어 나왔다.
기침. 그리고 로제의 목소리에 이어, ……아이의 목소리까지.
‘깨어난 건가?’
헤이번은 플리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가 정신을 차린 건가 싶어 양철통을 다시금 챙겨 든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가 막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플리타가 기침을 하다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콜록, 나…… 나 죽는 거야?”
헤이번의 손이 문고리에 막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그대로 멈춰 서서 손을 거두었다. 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감이 제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제 손에 들린 양철통이 보였다. 그리고 그 통 안에 담긴 장작도.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제 꼴이 우습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가 저렇듯 아파하고 무서워하는데, 아비라는 작자는 고작 장작 몇 개 가져왔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니.
‘……엉뚱한 상상이나 하면서.’
헤이번이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돌아서려는 찰나, 로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공녀님.”
울먹이는 아이를 토닥이듯, 로제는 차분하게 아이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플리타는 계속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쁜 병이라고 했어. 사실은…… 나, 하녀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어. 엄청 나쁜 병이라고, 사람들한테 막 옮기는 병이라고. 그래서 아빠가 나를, 흑, 나를 여기로 쫓아낸 거라고. 원래 더 멀리 쫓아냈어야 하는 건데…….”
“공녀님.”
“그 하녀도, 흐엉, 그래서 나 보고 놀라서 소리 지르고 도망간 거야. 나한테서 병 옮을까 봐. 내가……. 내가, 흑, 있잖아, 로제. 아빠가 나를 미워하면 어떡해? 밖에 나가면 안 되는 규칙을 어겨서, 흐윽, 그래서 두 번 다시 나를 안 보려고 하면? 내가,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면.”
끔찍한 말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헤이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로제의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거짓말. 아빠, 나 안 좋아하는 거 맞잖아. 로제 오기 전에는 나랑 밥도 안 먹고, 나랑 같이 있으려고 안 했는걸.”
플리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헤이번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제 무심함이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으리란 걸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그게 아니다, 플리타. 나는 그저…….’
헤이번이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침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로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공녀님, 공녀님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흐잉, 내 이름 뜻?”
플리타가 훌쩍이다가 로제의 말에 관심이 생겼는지 물었다. 아마도 아이의 마음을 달래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들어가는 것도 그 모양새가 이상할 듯했다.
헤이번은 장작이 담긴 통을 조심스럽게 문 옆에 내려놓은 뒤, 벽에 기대어 섰다. 아이의 관심은 다른 데로 돌렸는지 몰라도 제 죄책감은 그 자리에 맴돌았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이름에, 콜록, 뜻이 있어?”
그런 아비의 무거운 마음을 알 리 없는 플리타는 울음을 그치고는 로제에게 질문했다.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의식 없이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서 울더니, 이제는 금세 호기심을 보인다.
‘그 순진함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헤이번이 헛웃음을 삼키고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아이가 깨어났으니 다행이었다. 그나마 한고비를 넘긴 셈이라 해도 될 테니 말이다.
‘주치의에게 아이가 깨어났다는 걸 알려야겠군.’
헤이번이 페드윈을 시켜 주치의를 불러오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로제가 조금 전 아이가 했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들꽃 이름이에요.”
“들꽃?”
“예. 생명력이 강해서 겨울이 되어도 쉽게 지지 않는, 작고 빨간 꽃의 이름이 ‘플리타’예요.”
「이 꽃 이름이 플리타거든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명력이 강해서 겨울이 되어도 쉽게 지지 않는.」
그 순간 기억 속 목소리와 로제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헤이번은 환청과 뒤섞인 소리에 두통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플리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하겠느냐 묻던 집사의 말에 무심코 나온 게 바로 그 이름이었다.
「플리타. 그 이름으로 하지.」
왜 그 이름이 제 입에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보다도 입이 제멋대로 먼저 그 이름을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플리타.
플리타 괸터스로 하겠다고.
이름에 뜻이 있는지도 몰랐고, 하물며 들꽃의 이름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괸터스의 핏줄, 대공의 자식에게 붙이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니 당시 집사가 제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 터.
‘이제야 야닉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는군.’
헤이번은 피식 웃으며 문을 조심스럽게 조금 더 열었다. 그 틈으로 아이와 하녀의 모습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나 안아 달라 하였던 건지, 로제가 침대에 앉아 플리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다정한 모녀처럼.
그녀가 플리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대공 전하께서 공녀님의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응. ……아빠가, 콜록, 지어줬어.”
“전하께서는 분명히 공녀님이 그 꽃처럼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그래서 플리타란 이름을 지어주셨겠죠. 한겨울 추위에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정말?”
“그럼요. 공녀님의 이름부터가 그런 뜻인걸요. 설마 대공 전하께서 그 뜻도 모르고 무작정 아무 말이나 쓰셨겠어요? 전하께서 얼마나 똑똑하신 분인데요.”
낯 뜨거운 말이었다. 헤이번은 정말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무심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알지도 못하는 들꽃 이름을, 아이의 이름으로 쓰라 하였다고?’
헤이번의 푸른 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 와중에 플리타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작게 기침을 하더니 이내 웃었다.
“나도 내 꽃 보고 싶어. 콜록, 플리타는 어떻게 생겼어? 정원에서 한 번도 못 봤는데.”
“들꽃이라 그럴 거예요. 시골에서는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런 곳에서는 보기 힘들죠. 나중에 공녀님 몸 건강해지면, 우리 같이 꽃구경하러 가요.”
“진짜지?”
“그럼요. 그러니까 일단 약 드시고 다시 푹 주무셔야 해요.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나아서 꽃구경하죠.”
로제가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다시 침대에 눕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헤이번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내려놓았던 양철통을 침실 바로 앞, 문만 열면 보일 수 있는 곳에 옮겨 놓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 * *
“페드윈 경.”
“집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페드윈은 문을 열어준 야닉에게 인사를 건넨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곧 인상을 찌푸리며 헤이번이 앉아 있는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차를 몇 잔이나 드신 겁니까, 전하? 설마 식사는 안 하시고 이 차만 드신 건 아니지요?”
페드윈은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헤이번은 그의 물음에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듯 서류를 훑어보느라 바빴다. 페드윈의 시선이 집사에게로 향한 건 당연했다.
“……험험.”
추궁하는 듯한 호위 기사의 시선에 집사가 면목이 없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하, 공녀님 걱정으로 입맛이 없으신 건 이해합니다. 그래도 식사는 잘 챙겨 드셔야지요. 그러다가 전하께서 먼저 쓰러지시면 어떡합니까. 가뜩이나 밤에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아니, 주무시지는 않더라도 침대에 누워 푹 쉬시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밤마다 별관 근처를 맴도시니……. 무슨,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페드윈 경. 내가 자네 잔소리를 듣자고 부른 건 아닌데.”
헤이번이 서류 끝에 서명을 하여 옆으로 치워놓고는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페드윈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무례하다 할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저를 염려하여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헤이번은 페드윈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한 가지 찾아올 게 있네.”
“……설마 ‘또’ 장작은 아니겠지요?”
페드윈이 언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던가 싶게 금세 농담조로 말을 꺼냈다. 그 나름대로는 아픈 공녀에 대한 걱정으로 초췌해진 주인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장작은 아닐세.”
“그럼…… 뭡니까? 명령만 내리시지요, 전하. 무엇이든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