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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역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이제야 그녀의 팔이 눈에 들어온 걸 보면. 그는 부목을 대지 않고 그냥 붕대만 감아 놓은 로제의 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뒤늦게 그의 질문을 이해한 로제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불……편해서요.”
불편하다는 게 부목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니리라. 아마도 일하는 데에 불편하다는 것이겠지.
헤이번은 기가 막혀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뼈가 제대로 붙지 않으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전하.”
로제가 잔뜩 피로가 쌓인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못마땅한 마음이 든 헤이번의 말이 다소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누가 들었더라면 놀랐을, ‘헤이번 괸터스’답지 않은 말투였다.
“괜찮기는. 평생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플 수도 있는데.”
그의 말을 가만히 미소 지으며 듣던 로제가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생, 이라고요?”
“그래, 평생. 아직 젊은 나이인데 늙을 때까지 수십 년은 남았지 않나. 그런데 뼈가 제대로 붙지 않고 삐딱하게 붙은 채 살면 이래저래 힘들 거다. 그때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헤이번은 로제를 향해 말을 하다가 인상을 썼다. 제 말이 어쩐지 늙은이의 잔소리 같단 생각에서였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됐어. 어차피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인데 내가 괜한 말을……. 로제?”
하지만 헤이번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저를 보는 로제의 표정이 이상한 탓이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정확히 본 건 아니지만, 어쩐지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마음이 괜히 조급해질 정도로.
“로…….”
헤이번이 다시 로제를 부르려는 순간, 로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그녀의 목이 잠겼다. 그리고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졌다. 뭔가가 거슬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것이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침실을 나서는 헤이번의 뒷모습을, 로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본관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가 나가는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다. 하기야 밤새 이곳에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와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 애당초 환자를 따로 격리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는 아이의 곁에만 붙어 있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가 그것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대공’이라는 지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로제는 헤이번이 간다고 하여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평생.’
로제는 문득 헤이번이 조금 전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입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려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평생’의 시간과 실제로 제게 남은 ‘평생’의 시간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저 남자는 과연 짐작이나 할까.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와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전부 박제할 수 있으면 그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플리타의 뺨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로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시간은 계속 흘러야 해, 아가.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아빠와 너의 시간은…….’
“그러니까 제발…….”
‘이제 그만 일어나렴.’
그 간절한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플리타가 로제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으응, 하고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아이의 눈꺼풀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헤이번이 다시 본관으로 돌아갔다고 추측한 로제의 생각과 달리, 그는 장작을 가지러 나왔다. 물론 그는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미간을 좁힌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장작을 어디서 가져와야 하지?”
그가 알 리 없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지만, 그렇다 하여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번은 곧 여유로운 표정으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록 자신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제 호위 기사는 알 터였다. 혹은 모른다 해도 알아낼 것이고.
“페드윈 경.”
헤이번은 현관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직한 목소리로 페드윈을 불렀다. 별관을 지키라 하였으니 지금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리고 그 예상대로 페드윈이 냉큼 헤이번의 부름을 받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헤이번은 제 앞에 서서 깍듯하게 예를 취한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작을 어디서 가져와야 하나?”
“……예?”
진지하게 명을 기다리던 페드윈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고 여기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전하, 송구하지만 다시 한번만 말씀을…….”
“장작 말이야. 어디서 가져오는 건지 알고 있나?”
“……허어.”
페드윈이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을 지으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제 주인이 건넨 물음이었으니 충실히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설령 그게 장작을 보관하는 곳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창고가 별관 뒤……. 아니,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장작을 얼마나 가져오면 될까요?”
페드윈은 헤이번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말을 고쳤다. 대공이 직접 장작을 가지고 나온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손사래를 치고는 그의 말을 거절했다.
“됐네. 어차피 자네가 장작을 가져온다 해도 별관 안으로 들여놓는 건 내 몫이야.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내가 장작을 직접 가져오는 편이 낫지.”
“그럼 제가 별관 안까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공녀님의 침실로 옮겨 드리면…….”
“아니. 별관에 출입하는 인원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헤이번은 페드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태도에 페드윈이 난감해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페드윈이 난처해하면서도 헤이번을 안내했다. 장작을 쌓아둔 창고가 별관 뒤쪽에 있었다.
“……이곳입니다.”
페드윈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헤이번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창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나무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명색이 집주인인데, 단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이군.”
“와 보셨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페드윈이 헤이번의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오며 대꾸했다. 헤이번이 제 호위 기사를 돌아보며 피식 웃고는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창고 안을 휙 둘러보았다.
창고 안은 어둑어둑했다. 장작이 가득 쌓인 터라 창고 옆쪽으로 나 있는 작은 창도 거의 가려져 있었다. 그러니 햇살이 들어오려 해도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녀는, 이 창고를 매일 드나들었을 것이다.
헤이번은 가냘픈 몸집의 여자가 제 팔보다 굵은 장작을 옮기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쪽 팔이 부러진 상태이니 더욱 힘든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매번 장작을 가져왔던 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것을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헤이번이 쓴웃음을 짓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을 가리키며 페드윈에게 물었다.
“……저 양철통에 장작을 담아가면 되는 건가?”
“예? 아아, 예! 그러면 되는 것 같습니다.”
페드윈 또한 하인이 하는 일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기에 확답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창고 안에 있는 양철통의 쓰임새를 두고 그렇게 추측하는 것 외에는 달리 추측할 게 없기는 했다.
페드윈이 냉큼 가져온 양철통을 받아든 헤이번이 장작을 담기 시작했다. 몇 개 담지도 않았는데 금세 통이 묵직해졌다.
‘이왕이면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겠군.’
그래야 그녀가 한 번이라도 덜 올 테니 말이다. 아픈 아이의 아비로서, 그 아이를 돌봐주는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대공이란 지위도, 어째서인지 그 여자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녀 또한 저를 ‘전하’라 부르며 깍듯이 공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공이라기보다는 그저 플리타의 아비로 대하는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제게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공녀이기에 앞서 그저 다섯 살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전하.」
「또한 전하께서는 대공이란 직위에 앞서, 공녀님의 아버지이시고요.」
실제로도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헤이번은 피식 웃으며 장작이 가득 담긴 양철통을 들었다. 그 모습에 페드윈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시 그를 뒤따랐다.
그저 다섯 살 어린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아비일 뿐.
헤이번은 페드윈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 손짓을 하고는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 장작이 담긴 통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죽을 때까지 해 볼 일이 없었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낯설고 어색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보다도 제 가슴속을 채워 주었다.
추운 날, 제 가족을 위하여 장작을 패는 아비의 심정이 이러할까.
‘사라진 기억 속에서는, 장작을 패 본 적이 있을까.’
설마 연약한 여인에게 그런 일을 전부 떠넘기고 얹혀살지는 않았겠지.
그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그립단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