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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7화 (6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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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괜찮으신지요?”

그 손길은 로제의 것이었다. 헤이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저보다 훨씬 연약한 여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도 굳건히 침대를 지키며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다가 느릿느릿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제 팔꿈치 위쪽을 부축하듯 잡고 있는 로제의 손을 보았다.

“앗,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전하께서 쓰러지실까 봐…….”

그 시선을 따라 로제도 눈을 내리더니 이내 당황하여 헤이번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제 팔을 잡았던 곳에는 온기가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헤이번은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가 조금은 편안해진 어조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로제.”

“……아, 아닙니다.”

로제가 그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이 때문에 창백하던 얼굴 위로 흐릿하게 홍조가 들었다. 물론 끙끙거리며 앓는 플리타를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지만 말이다.

헤이번 역시 그녀를 보던 시선을 거두어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의 작은 손이 뭔가를 찾듯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헤이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너를 찾는 것 같은데, 로제.”

“……예?”

“플리타 말이야. 네 손을 찾는 것 같군.”

헤이번이 아이의 꼬물거리는 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로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플리타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린 듯 로제의 손을 맞잡았다.

“……공녀님.”

로제가 침대 옆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제 손을 맞잡은 아이의 손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헤이번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와 비슷한 모습으로, 간절한 기도를 하듯.

* * *

“아이를 잘 부탁한다.”

“……염려 마세요, 전하.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헤이번이 침실 안쪽을 다시 힐끗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플리타가 깨어나는 걸 보고 갔으면 했는데, 아이는 여전히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시 계속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약함에서 비롯된 제 불길한 망상이 아이를 더욱 악화시킬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로제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공녀님은 분명 일어나실 거예요, 전하.”

“…….”

“꼭, 그러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셔서 푹 쉬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로제는 저를 보는 남자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걸 보았다.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보다 얼굴도 야윈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 자식이 아픈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을까.

헤이번을 보는 로제의 시선이 애틋했다. 지금 그의 속이 어떨지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없고, 함께 걱정을 나눌 수도 없으니…….

‘당신, 많이 외로울 텐데.’

그에게 직접 할 수 없는 말을 그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헤이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너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

“내가 아이의 곁에서 조금 더 있을 테니, 그사이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어때?”

“예? 아, 아니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로제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하야말로 얼른 돌아가셔서 휴식을…….”

“내 말대로 하는 게 낫겠어, 로제.”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러고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전하! 하지만…….”

로제가 그를 만류하기도 전에, 헤이번이 먼저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주치의가 문밖에서 옥신각신 이야기하던 것을 들었는지 헤이번과 로제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밤은 내가 있도록 하겠네. 특별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딱히 그런 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공녀님의 상태도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고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가장 비관적인 결말을 예상했는데, 플리타의 상태가 서서히 나아진 것이다. 주치의는 헤이번의 말에 대답을 하며 그의 뒤편에 선 로제를 힐끗 보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플리타의 몸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한 건 로제가 아이의 손을 잡아준 이후였다. 의식이 없는 건 틀림없는데, 마치 그녀가 제 손을 잡고 있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아이는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뭐랄까.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주치의는 언젠가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대공 저의 주치의가 되기 전, 젊었을 때였다. 열병에 걸려 발작하던 갓난아기를 진료했었는데, 아무리 해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던 그 아기가 어미의 품에 안기자마자 숨을 고르며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그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사례였다. 또한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약도 듣지 않고 그 어떤 치료도 듣지 않았는데, 그저 어미의 품에 안겼다는 이유만으로 아기의 증세가 호전되었다.

……지금, 공녀의 경우처럼.

‘아니,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주치의는 부디 그런 경우이기를 바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으니, 이제는 젊을 적 딱 한 번 보았던 그런 기적을 기도해야 할 때였다.

“다만, 로제 양이 공녀님의 곁에 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기에 주치의는 헤이번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주치의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찡그렸다. 반대로 로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도 제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공녀님도 로제 양을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

“어차피 지금은 잠들어 있지 않나?”

헤이번이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끼어들었다. 뭔가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주치의는 흠칫하며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하녀 대신 딸의 간호를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흐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 내 생각이 좀 허황된 것이기도 하고.’

주치의는 더 이상 말을 잇는 대신,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물러갔다. 로제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헤이번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전하.”

“……로제.”

“쉬더라도 여기서 쉬겠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로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그녀의 녹색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이내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고집불통이군.”

「이 고집불통 아가씨야.」

언젠가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고집을 부린 적이 있었다.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날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헤이번이 그런 저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말과 함께 제 콧등을 건드렸다.

그때와 지금은 너무나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사소한 일에 고집을 부렸지만, 지금은 플리타가 아픈 상황이라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혹여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무서워서.

……하지만, 저를 고집불통이라 부르며 가볍게 웃는 남자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웃음만큼은.

저를 안심시키는 그 다정함만큼은.

로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참은 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플리타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헤이번이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 * *

부우, 부우우.

부엉이가 우는 건지 창밖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은 문득 침실 안의 공기가 서늘해진 걸 느끼고 미간을 좁힌 채 고개만 살짝 틀어 벽난로를 보았다. 아까보다 불꽃이 작아진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벽난로 안의 장작이 거의 타버린 상태였다.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장작을 더 넣기 위해 옆에 놓인 사각 통을 보았다.

‘장작이 몇 개 안 남았군.’

지금 넣으면 아침까지 쓸 것이 거의 없을 듯했다. 장작을 넉넉히 채워 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건 전적으로 로제의 실수였다.

그러나 헤이번은 로제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된 플리타로 인하여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조용히 벽난로 안에 장작을 넣고 돌아섰다. 로제는 플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한 시선으로 아이를 보고 있었다. 어찌나 아이에게 집중했던지, 제 시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라고 했더니…….’

헤이번은 혀를 찼다. 아마 로제는 잠 한숨 안 자고 지금껏 저 모습으로 플리타를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새삼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맡은 일이라 해도 어떻게 이렇듯 헌신적일 수 있을까.

별관 안에서의 일주일은 고되었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혼자 다 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요리도, 청소도, 빨래도. 그리고 아이의 간병까지도.

몸이 튼튼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한쪽 팔이 불편하기까지 한데…….

“……?”

바로 그 순간, 헤이번의 시선에 로제의 팔이 들어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목을 대고 있어야 할, 다친 팔 말이다.

“부목을 왜 대지 않은 거지?”

헤이번은 나직한 목소리로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로제가 플리타를 보다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팔에 대고 있던 부목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 빼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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