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6화 (66/134)

66

“……예?”

아이의 물음에 로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플리타가 눈을 꾹 감아 눈물을 떨구더니 다시금 물었다.

“나 병균 옮겨서, 그래서 다들 나 싫어해?”

“공녀님, 그건…….”

로제가 황급히 아이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플리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 다리 많이 달린 벌레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하녀가 그렇게 비명을 질렀었어. 나…… 다리 많이 달린 벌레인 거지?”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는 저를 향한 혐오를 또렷하게 느낀 것이다.

어리다고 해서 자신을 향한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법이다. 왜곡하지도 않고, 순수하게. 때로는 상처가 되는 부정적인 감정조차 직접적으로.

“그럼, 나 계속 여기서 살래. 밖에 안 나가. 로제도……. 흐잉, 로제도 나가도 돼. 나 무서우면, 나 싫으면…….”

플리타가 손으로 연거푸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자꾸만 눈물이 아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바람에 아이의 코와 입을 감싼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었다.

로제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자그마한 손 역시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부목을 대고 있던 터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쪽 팔 때문에 아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공녀님.”

그 대신 로제는 플리타를 향해 따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은 반드시 나을 거예요. 주치의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공녀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다른 때 같았다면 로제의 말에 금세 밝게 웃었을 아이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플리타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쉽게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 * *

“플리타가 별관 밖으로 나왔단 건가?”

헤이번은 집사의 보고를 받으며 서류를 훑어보다가 문득 제 귀에 들려온 아이의 소식에 미간을 좁혔다.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아……. 물론 멀리 나오신 건 아니고, 그냥 현관문 앞에 나와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온 건 나온 거지.”

헤이번이 표정을 굳히고는 중얼거렸다. 집사는 혹시 제 주인이 아이를 야단칠까 싶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이제 겨우 다섯 살이시지 않습니까. 지금껏 별관 안에서 얌전히 계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지요. 다른 아이였다면 하루도 못 견디고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공녀님이시니까…….”

“나도 알고 있네, 야닉. 다만……. 어떤 식으로든 플리타에게 주의를 줘야 하지 않겠나. 아이가 괜한 말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이지.”

가벼운 실수가 제멋대로 크기를 부풀려 큰 잘못으로 왜곡되는 걸 숱하게 봐 왔다. 아이가 별관 밖에 잠시 나온 일도 더 크게 부풀려져 괜한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나서서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는 편이 나았다. 그럼 감히 대공이 말한 잘못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 헛소문을 퍼뜨리는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후우…….”

헤이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실, 기특하다고 칭찬해도 모자랄 아이였다.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생활하니 오죽 답답했겠는가.

더구나 몸 상태가 나날이 호전되고 있으니, 아이로서는 싱그러운 바람도 쐬고 싶고 따스한 햇살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사소한 마음으로 문밖으로 한 발을 내놓았을 텐데…….

“아비가 되어 아이의 그런 바람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군.”

헤이번은 쓴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사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느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아이의 잘못으로 인해 병이 더 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별관으로 가겠다.”

그는 얼굴을 가릴 손수건을 챙겨 들고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바로 그때, 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전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페드윈이었다.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그를 보았다. 페드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페드윈 경?”

그를 향해 묻는 헤이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자신을 호위하는 대신 별관 근처에서 아이의 동태를 살피라 명을 내렸는데 이렇듯 다급한 표정으로 왔으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고, 공녀님께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페드윈이 사색이 된 채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별관 침실에, 소, 손수건이…….”

“……!”

“붉은색 손수건이 걸렸습니다!”

페드윈의 말을 듣던 헤이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페드윈을 지나쳐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집사가 당혹해하며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별관으로 갔습니다.”

페드윈이 헤이번의 뒤를 따르며 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헤이번이 초조한 낯빛으로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복도를 거의 내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콜록! 콜록!”

침실 안에서 들려오는 플리타의 기침 소리가 그냥 듣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폐를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헤이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치의가 사색이 되어 플리타의 상태를 살피다가 헤이번이 다가가자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저, 전하.”

“아이는? 아이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 그것이.”

주치의는 헤이번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느라 바쁠 뿐이었다. 하지만 주인의 물음에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주치의는 어쩔 수 없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

“던퍼스 병에 걸린 이들의 예후가 대부분 그러하였는데 공녀님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공녀님 역시…….”

주치의는 차마 그 뒷말을 할 수 없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공 저의 주치의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이였다. 수도의 어느 누구도 그의 실력을 능가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 나라 전체를 살펴본다고 할지라도 그럴 터였다.

하다못해 왕실의 궁의라 할지라도 과연 그보다 더 뛰어날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이의 예후를 장담하지 못했다. 되레 아이의 죽음마저 예상하고 있었다. 주치의가 아이의 죽음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낸 건 아니지만, 침실에 있는 이들 모두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알아들었다.

헤이번도, 그를 따라 별관으로 들어온 페드윈도. 그리고…….

“아니에요!”

모두가 절망으로 무너지려는 순간, 절박한 목소리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럴 리 없습니다! 선생님, 포기하지 마세요! 전하, 아직 포기하시면 안 돼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로제였다. 로제는 플리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있다가 입술을 깨물고는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 위로 헝클어진 머리가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헤이번을 보며 단호한 투로 말했다.

“공녀님은 나으실 수 있어요. 분명히 완쾌되실 거예요.”

그 광경을 보던 주치의가 혀를 차고는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제 양, 나 역시 같은 마음이오. 공녀님께서 완쾌되시는 걸 그 누가 바라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가능성이 희박하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그만하세요, 선생님!”

로제가 헤이번을 보던 시선을 돌려 주치의를 쏘아보았다. 늘 온순하고 얌전하던 사람답지 않은 날카로움이었다. 주치의가 그 모습에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아니, 공녀님이 들으세요. 낫게 해 줄 거라 믿었던 어른들이 이런 비관적인 얘기를 하는 걸 들으면.”

로제는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할 뻔하다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주치의가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해서 좀 그렇지만, 공녀님은 의식이 없는 상태요. 그런데 무슨…….”

“아니. 로제의 말이 맞다.”

그 순간, 침묵하던 헤이번이 주치의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로제를 쳐다보았다. 로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플리타보다 저 여자가 먼저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낸 뒤, 말을 이었다.

“의식이 없다 해서 청각마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겠지. 실제로 죽음을 앞두고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 하지 않던가.”

헤이번은 언젠가 의학 서적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렸다. 그러자 주치의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미처…… 공녀님을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됐네. 자네는 아이의 치료에 전념해 주기만 하면 돼.”

헤이번이 주치의의 사과를 받고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로제 역시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침대로 몸을 돌렸다.

“으으응, 흐윽…….”

플리타는 이 소란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지 못한 채 계속 신음만 내뱉었다. 헤이번은 그런 아이의 모습에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가슴속이 얼어붙는 것처럼 공포가 밀려들었다. 막연히 아이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걸 알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이대로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로제는 플리타가 반드시 완쾌될 거라 하였지만 말이다.

솔직히 그것은 헛된 기대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이미 죽음의 문턱 언저리에 가 있는 듯싶었다. 창백한 얼굴도 그렇고, 가쁘게 몰아쉬는 숨도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으음…….”

그는 비통함에 젖어 저도 모르게 침대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헤이번의 팔을 붙잡았다. 위로하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