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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4화 (6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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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번은 별관 앞에 서서 가만히 2층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인 터라 침실의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본관 곳곳에도 켜져 있는 불빛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관의 침실 창문을 통해 새어 나오는 불빛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아늑해 보였다. 제 침실보다도 더. 아니, 한 번도 아늑함을 느끼지 못한 제 침실과는 달리.

“어이없군. 아이가 아파서 저곳에 가 있는데, 아비라는 작자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고.”

그는 괜한 감상에 젖어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하여 피식 조소한 뒤, 다시 염려 가득한 눈으로 별관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첫날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불안감이 문득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과연 플리타가 병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 두려웠다. 아이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또한 대공 저의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애써 덤덤한 척하려 했지만, 그는 그저 아픈 아이를 둔 아비에 불과했다.

그 홀로 감당해야 하는.

함께 이 두려움을 나눌 사람이 없는.

“잘하고 있겠지. ……로제가 같이 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든 외부에 알릴 테고.”

헤이번은 스스로 불안을 달래기 위하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무도 별관에 접근하지 말라고 해 놓고 자신이 이곳에 기웃거리는 걸 누군가가 본다면 안 될 터였다.

던퍼스 병이 대공 저에서부터 퍼져 나갔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는 미들피온에서 전해진 소식에 발칵 뒤집힌 왕실을 떠올렸다. 그렇듯 저를 귀찮게 굴던 선왕비조차 당분간 왕궁에 발걸음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서신을 보내올 정도이니…….

헤이번이 다시금 피식거렸다. 어쨌든 그 바람에 수도 전체가 뒤집힌 상태였다. 소식을 먼저 접한 왕족과 귀족들이 저마다 저택 문을 걸어 잠그거나 느닷없이 지방으로 떠나버렸다. 단 하루 만에 말이다.

그는 정신없이 몰아쳤던 하루를 돌아보다가 충동적으로 다시 별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잘난 왕족과 귀족들조차 덜덜 떨며 무서워하는 그 병에 걸린 아이를 한 번이라도 몰래 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오늘 하루는 어떠했는지.

몸은 더 나아졌는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난 뒤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헤이번은 별관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하다못해 현관문을 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들어선 복도는 어둡고 적막했다. 침실 창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의 따스함과는 달리 복도에서는 냉기마저 감도는 것 같았다. 헤이번은 복도를 걸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당연했다. 어린아이 하나와 하녀 하나, 그렇게 단 두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어찌 따스하고 아늑하겠는가. 그리 큰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여 두 사람이 살기에 작은 곳도 아니니 말이다.

‘아이가 낯설어서 울지는 않았을지 모르겠군.’

헤이번은 별관의 이런 적막에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렸을 아이를 상상했다. 가뜩이나 몸도 아픈데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앞으로 계속, 기약도 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했을 것이다.

‘……혹시, 침실에서도 울고 있는 건 아닐까?’

헤이번의 얼굴이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밖에서 혼자 침실을 올려다보며 따스한 것 같다는 둥 아늑해 보인다는 둥 했던 저를 한 대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제 자신에 대한 자책과 아이를 향한 걱정으로 무거워진 발걸음이지만, 헤이번은 플리타의 침실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욱 아이를 보고 싶어 발길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저 울고 있지만 않기를…….’

까르르.

그 순간, 침실 안쪽에서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침실 문 앞에 서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오늘 진짜 재미있었어, 로제!

플리타가 신나서 외치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로제가 다정히 웃으며 아이에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재미있으셨어요?

-응! 페이스트리 위에 시럽 바르는 것도 재미있고, 또…… 아까 빵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어! 우리, 내일 또 같이하자! 내가 도와줄게!

‘이게 무슨…….’

헤이번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틀림없었다.

‘아이가 빵을 만들다니…….’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약을 먹고 푹 쉬어야 할 아이가 대체 그런 것을 왜 한단 말인가. 더구나 몸이 건강할 때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공녀가 어떻게 그런 허드렛일을 한다는 말인가.

-내가 밀가루 반죽도 해서 그런지, 빵도 더 맛있었어.

-그러셨어요?

-응! 그리고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된 거 같아!

기가 막혀 하는 헤이번과 달리 플리타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듣던 헤이번의 미간이 좁아졌다.

‘……굉장한 사람?’

-굉장한 사람요?

로제가 그의 의문과 비슷한 의문을 품었는지 질문을 했다. 그러자 플리타의 대답이 이어졌다.

-유모는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거든. 유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그냥 공녀답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고. 로제, 나 공녀 안 하고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돼? 인형처럼 사는 거 재미없어.

“……!”

헤이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하던 그의 손이 거두어졌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던 그의 귓가에 플리타의 말이 다시금 들렸다.

-근데 오늘은 나 이것저것 막 했잖아. 달걀도 처음 깨 봤는걸! 나도 할 줄 아는 게 많았어. 난 바보가 아니었어, 그치?

-그럼요, 공녀님.

헤이번이 거두었던 손을 다시 문고리로 뻗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플리타와 로제가 침대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녀가 감히 주인과 한 침대 위에 있느냐, 그리 나무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것도 제 아이가 했다는데 뭘 더 놀라겠는가.

……게다가 그런 덕분에 아이가 저렇듯 환하게 웃고 있는데.

제가 굉장한 사람이 된 거 같다며 기뻐하는데.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아이를 보던 헤이번의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스쳤다.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지만, 아이가 로제와 함께 주방에서 요리를 한 모양이었다. 물론 요리를 했다기보다는 곁에서 장난을 치고 방해를 했겠지만 말이다.

결코 왕실, 아니, 한미한 귀족가의 아이라 할지라도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하녀를 호되게 야단쳐야 할 터였다.

그러나 헤이번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아이에게 향했다.

얼굴의 절반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어서 그 안색을 정확히 살피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타의 얼굴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택에 있을 때보다 더 밝고 활기차 보였다.

평범한 다른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흙투성이로 돌아다니던 마을의 꼬마들처럼.

「우리 아이는 골목 대장을 시켜야겠어.」

「뭐라고요? 여자애한테 뭘 시켜요?」

「어허, ‘여자애한테’라니. 그거 성차별적인 발언입니다, 부인.」

장난스럽게 말하던 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저를 보며 어이없단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고는 품에 안은 아기를 토닥거리던 여인이 떠올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를 토닥거리던 여인의 가냘픈 손이…….

“으음…….”

헤이번은 느닷없이 찾아든 두통에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문 옆쪽 벽에 기대어 섰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들은 환청이 정말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지금 자신이 몰래 엿본 저 광경이 자신과 플리타의 생모, 그리고 플리타까지…… 우리 세 식구의 모습이 될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혀 귀족적이지 않고, 전혀 고상하지도 않지만.

그런데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처음에 아이의 말을 듣고는 어이없고 화까지 나려 했는데 말이다. 저렇게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까, 아이가 제 엄마와 함께 밀가루투성이가 되어 까르르 웃어대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아…….”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침실 안에서 플리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어디 가려고? 나도 갈래!

-아니에요, 공녀님.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요. 잠깐만요.

헤이번은 로제의 말에 황급히 침실 옆방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가 문 뒤에 기대어 선 직후, 로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문이 조금 열려 있었네요. 그래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느꼈나 봐요.

로제의 다정한 목소리가 문을 사이에 둔 채 들렸다. 헤이번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플리타가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 밖으로 나왔는지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아빠 온 거 아니야?

아이의 목소리에 헤이번이 눈을 번쩍 떴다. 로제가 작게 웃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를 보고 싶으세요?

-으응……. 그냥 혹시 아빠가 온 건가 해서. 괜찮아. 로제랑 나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며. 나 안 잊어먹었어.

플리타가 실망한 기색을 지우며 애써 밝게 말했다. 헤이번은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렇게 참고 있다 보니 로제와 플리타가 다시 침실로 들어간 듯 기척이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고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이제 잠을 자려는지 침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어둑어둑해졌다.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헤이번은 한동안 침실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달이 창문 안을 기웃거리며 그가 홀로 뭘 하나 엿보다가 지쳐 하늘 저편으로 가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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