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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어? 여기도 또 있어! 이번에는 곰 인형이다, 그치? 우와, 이건 강아지야! ……히잉. 강아지 인형 보니까 하양이 보고 싶다.”
플리타가 가방 안에서 여러 개의 헝겊 인형을 꺼내며 신나 하다가 이내 하양이를 보고 싶다며 시무룩해졌다. 플리타가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직후, 미들피온에서 데려왔던 강아지 역시 별도로 격리되었다. 혹여 강아지를 통하여 병이 전파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픈 거 다 나으면 우리 그때 다시 하양이 데려와요.”
“하양이가 그새 나 잊어버리면 어떡해?”
플리타가 울상을 하며 로제를 향해 물어보자 로제가 가만히 웃고는 아이를 달랬다.
“안 잊어버릴 거예요. 공녀님은 하양이를 잊으실 거예요?”
“아니! 절대로 안 잊어! 하양이는 내 친구야!”
“하양이도 마찬가지예요. 하양이한테 공녀님은 친구이니까요.”
“우웅…….”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제 손에 들려 있던 강아지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그때까지는 얘가 내 친구야. 아니, 얘네들도 다 내 친구야.”
“공녀님, 그건 그저 낡은 헝겊 인형일 뿐인데요. 더구나 다 만들지도 않은.”
“괜찮아. 다 내 친구 할래.”
플리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헝겊 인형들을 전부 품에 안았다. 로제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다시금 아이를 달랬다.
“공녀님께서 가지고 노시던 인형들도 전부 별관에 가져다 놓았는걸요. 그러니 그것들은 이리 주시고요.”
“싫어! 이 인형들이 더 좋아! 나 주려고 만든 거 아니야?”
“……!”
헝겊 인형들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꼭 끌어안은 플리타의 말에 로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웃음 짓고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공녀님. 공녀님 드리려고, 만들었어요.”
“치이, 그것 봐. 내가 다 아는데.”
플리타는 주섬주섬 헝겊 인형들을 챙겨 일어났다. 로제가 저를 위해 만들었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아이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이제 침대에 가서 쉬셔야죠? 약속하셨으니까요.”
“으응, 그럼 로제는?”
“저는 가방 정리 마저 하려고요.”
“여기서?”
“물론 여기서요.”
로제의 말에 플리타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가 헝겊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좋아.”
“뭐가요?”
“로제랑 나랑 단둘이 있는 거. 유모 없이. 저번에 아빠랑 같이 여행 갔을 때처럼.”
“…….”
“로제 말이 맞아. 꼭 소풍 같, 콜록. 소풍 같아.”
플리타가 중간에 기침을 하고도 밝게 웃었다. 로제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은 뒤, 아이를 이불로 꼼꼼히 감싸 주고는 가방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몸을 돌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방에서 꺼내 놓은 옷가지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아이에게 주려고 만든 인형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었으니까.
수도에 올라오기 전, 아니,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에 제 아이를 상상하며 만들었던.
그러나 어차피 전해주지 못할 것이기에, 게다가 천 쪼가리를 기워 만든 헝겊 인형 따위보다 더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제대로 완성도 하지 못한 채 어딘가에 처박아두었던 것들이었다.
그것을 미련처럼 가지고 있다가 떠나올 때 챙겨 가지고 왔다. 쓸모없는 잡동사니라 이름 붙인 채, 옷가지 사이에 넣어서 말이다.
‘……이렇게 주게 될 줄 알았으면 완성이라도 할 걸 그랬지.’
로제는 눈물을 닦은 뒤,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값싼 헝겊 쪼가리로 만든 인형이 뭐 그리 좋다고, 아이는 여전히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로제가 그 모습을 보다가 미소를 지은 뒤, 다시금 몸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금 당장 청소를 할 일은 없을 듯했다. 공녀가 머무를 곳이니 어찌 되었든 미리 고용인들이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청소를 해 놓은 덕이었다.
‘그럼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할까.’
저녁을 준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별관에 온 첫날이니 빨래를 할 것도 없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와중에 여유로움을 누리는 제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콜록!”
그 순간, 인형을 가지고 놀던 플리타가 기침을 했다. 로제가 황급히 몸을 돌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목이 아프신가요, 공녀님?”
“으응, 조금……. 콜록!”
아이가 기침을 할 때마다 입을 가린 손수건이 흔들렸다. 로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플리타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따뜻한 코코아를 드릴까요?”
“코코아? ……으응.”
플리타는 기침을 하다 말고 ‘코코아’란 말에 귀가 쫑긋해져 로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공녀님. 디저트랑 같이 준비해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아이에게 간식을 줄 시간이 되어 갔기에, 로제는 부랴부랴 디저트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아……. 다행이다.”
로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오븐을 열었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사과 향기가 물씬 풍기는 슈트루델이 적당히 노릇노릇 구워져 제 모습을 뽐냈다.
“처음이라 실패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는 부목을 댄 팔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틀을 꺼냈다. 본래 양손으로 들어야 하는 것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팔로 그 밑을 받친 터라 로제의 모습은 조금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다행히 오븐 틀을 엎어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제는 탁자 위에 간신히 틀을 내려놓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끝에 흡족한 미소가 스쳤다. 얇게 저민 사과 조림을 사이사이에 넣어 구워낸 페이스트리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음, 그럼 이제 위에다가 시럽을 바르고…….”
툭.
“앗.”
뒤편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이가 깜짝 놀라 내뱉은 소리가 이어졌다.
로제가 그 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주방 출입문 근처에서 헝겊 인형을 주워 들던 플리타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듯 웃었다.
“헤에, 로제.”
“공녀님! 여기는 어떻게…….”
“우웅, 혼자 있는 거 심심해서.”
플리타가 다시 한번 히힛, 하고 웃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나 들어가도 돼?”
“음……. 예, 공녀님.”
로제는 혹시 위험한 물건이라도 있나 싶어 주방 안을 둘러보고는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늘 ‘공녀답게’ 행동해야 했던 아이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기회를 주고 싶었다.
“우와……. 응? 이건 무슨 냄새야?”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지만 달콤한 사과 향기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뜨거운 슈트루델을 이제 막 오븐에서 꺼내 놓은 터라 그 향기가 주방 전체에 더욱 퍼지기도 했을 테고 말이다.
“어? 뭐야? 로제가 뭐 만들었어?”
아이는 탁자 위에 놓인 슈트루델을 보려고 두 손으로 탁자를 잡고 까치발을 했다. 하지만 키가 작은 탓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로제가 그런 플리타를 보며 다시 한번 웃은 뒤, 주방 한쪽에 치워두었던 의자를 끌고 왔다.
“여기 앉으실 수 있으세요, 공녀님?”
팔이 불편한 탓에 플리타를 직접 안아서 의자에 앉힐 수 없었다. 로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묻자 플리타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더니 낑낑대며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토끼 헝겊 인형도 탁자 위에 덩달아 올라갔다.
“나 혼자 잘해, 로제. 걱정 마.”
플리타가 로제의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슈트루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우와아, 이거…… 로제가 구운 거야?”
“예. 제대로 구워 본 건 처음인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에 살 때는 이처럼 호화스러운 디저트를 아예 알지 못했다. 그나마 대공 저에 들어와 이것저것 눈으로나마 보고 익힌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진짜 맛있겠다! 나 먹을…….”
“아, 아직 안 돼요. 공녀님. 시럽을 바르고 그 위에 슈가 파우더를 뿌려야 하거든요.”
로제가 플리타를 만류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슈트루델을 향해 작은 손을 뻗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시럽? 슈가 파우더?”
“예. 여기, 이 솔을 가지고 시럽을 골고루 발라준 다음에요. 슈가 파우더를 마찬가지로 이 위에다가 눈 내리듯이 뿌려주면 되는……. 공녀님?”
“저기, 나! 내가 한번 해 보면 안 돼?”
로제는 설명을 이어가려다가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가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게 손까지 번쩍 들더니 애타게 부탁했다.
하지만 그 부탁이란 게 너무 예상치 못한 것이라 로제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되묻고 말았다.
“공녀님께서 해 보신다고요? 이걸요? 시럽 바르고…….”
“응! 시럽 바르고 슈가 파우더도 뿌릴래!”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로제는 그 말을 듣고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아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번쩍 들었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안 돼? 우응, 알았어. 괜찮아. 그냥 한번 궁금해서…….”
“안 되기는요.”
로제는 플리타가 제 눈치를 살피는 걸 보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지금 우린 소풍 온 건데.”
“그, 그치? 맞아! 소풍! 우리 소풍 왔어!”
플리타가 로제의 눈치를 보다 말고 환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로제는 아이를 가만히 보았다. 대공 저 본관에서 지낼 때보다 아이가 훨씬 밝아 보였다. 몸이 아파서 안색은 좋지 않은데 말이다.
뭐랄까. 지금 이 모습이 다섯 살 보통 아이의 모습과 더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면 기웃거리는 여느 가정집의 아이의 모습처럼…….
“좋아요. 그럼 공녀님께 부탁드릴게요.”
로제는 시럽이 담긴 그릇과 작은 솔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플리타가 헝겊 인형을 아예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두 손으로 그릇과 솔을 받아 들고는 눈을 반짝였다.
“예쁘게 잘 발라 주세요, 공녀님. 그사이에 저는 뒷정리를 하고 있을게요.”
“응!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바를게.”
플리타는 저만 믿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의자 위에 꼬물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더니 이내 시럽 안에 솔을 푹 담갔다.
달콤한 사과 향기가 주방 안에 더욱 몽글몽글 퍼져 나갔다. 로제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어린 딸과의 요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