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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2화 (6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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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소풍요. 별관에 가면 제가 맛있는 것도 해 드릴 거고, 같이 책도 읽고, 인형 놀이도 할 거예요. 잘 때도 자장가를 불러 드리고, 한 침대에 누워서 폭 끌어안고 자는 거예요. 기대되지 않으세요? 저는 공녀님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대돼서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는데.”

로제가 일부러 밝게 웃으며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헤이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더니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기대 돼.”

“그러니까요. 이제 별관에 들어가면 당분간 우리끼리 재미나게 지내는 거예요.”

로제는 괜히 더 유쾌한 투로 재잘거렸다. 훌쩍거리던 아이가 두려움을 잊고 설레는 마음으로 제 말에 맞장구를 칠 때까지.

헤이번은 제 품에 안긴 채 신이 나서 아픈 것조차 잊은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작은 아이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힐끗 로제를 보았다.

……강한 여자였다.

비록 몸은 약할지 모르지만, 마음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한 여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아이의 전담 하녀라 해도, 함께 미들피온에 다녀와 감염 우려가 높다고 해도, 그렇다 해서 던퍼스 병에 걸린 게 확실한 아이와 단둘이 격리되는 걸 바랄 리 없었다.

더 오랜 시간,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돌봐온 유모조차도 제 목숨을 구하려고 냉큼 휴가를 신청하여 대공 저를 떠나지 않았던가.

그 얄팍한 수가 훤히 보이는데도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제 목숨이 중요하고 자신의 몸이 소중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와 함께 별관에 들어가라고. 아이가 완치될 때까지 곁에서 간병을 하라고.

정 안 되면 자신이라도 아이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신들이 반대를 한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치의의 입에서 격리 이야기가 나온 순간, 본능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이 여자가 나섰다. 그저 스치듯 생각만 했던 자신과 달리, 로제는 곧바로 나서서 행동으로 옮겼다.

아이의 아비인 저보다도, 더 먼저.

그래서일까. 이 여자에게 느끼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가고, 가냘픈 어깨를 보면 안쓰럽고, 저를 보는 녹색 눈동자를 보면 가슴속이 술렁거리는 까닭은…….

“전하.”

그 순간, 주치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의 시선이 로제에게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움직였다.

별관 앞에서 대기 중이던 주치의가 헤이번을 보고는 예를 갖추었다. 로제가 플리타와 재잘재잘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플리타 역시 헤이번의 목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더니 서서히 힘을 뺐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려놓았다. 로제가 냉큼 플리타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치의가 아이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오늘은 좀 나아지셨는지요?”

“……네에.”

플리타가 주치의를 향해 작게 대답한 뒤, 곧바로 로제의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제 얼굴을 감추었다. 주치의는 그런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고는 다시 헤이번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루에 한 번 별관에 들어가 공녀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약을 지어 드릴 것입니다.”

“부탁하지.”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염려 마십시오, 선생님.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전부 알려 주시고요.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돌보겠습니다.”

로제는 주치의가 제게로 시선을 던지자 다부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인 뒤, 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들어갑시다. 들어가서 공녀님의 몸부터 확인하고, 그 뒤에 로제 양에게 당부할 말도 있으니.”

“예.”

로제가 주치의를 향해 대답하고는 플리타를 데리고 별관 쪽으로 들어가려다가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헤이번이 아이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 아이를…… 부탁한다.”

중간에 짧은 침묵이 있었다. 아이를 부탁한다는 그 말 사이의 침묵은 말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로제는 헤이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헤이번에게 많은 것을 말해줄 터였다.

헤이번은 별관으로 들어가는 플리타와 로제, 그리고 주치의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탁.

별관의 문이 굳게 닫혔다.

완치되기 전까지 아이는 저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할 터였다. 로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 같이 생활하니 감염 위험이 더 높아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요?”

주치의는 별관 안으로 들어가 플리타의 몸 상태부터 확인한 뒤, 방에서 나와 로제에게 이런저런 사항에 대하여 당부했다.

커다란 손수건으로 항상 입과 코를 가릴 것, 아이가 사용한 물건은 전부 뜨거운 물로 매번 씻을 것, 그리고 침대 시트와 이불 또한 가급적 매일 빨아서 햇볕에 널어둘 것 등이 주치의가 당부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그 팔로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주치의가 부목을 댄 로제의 팔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염려 가득한 투로 물었다. 로제가 수첩을 협탁에 놓은 채 주치의가 당부한 사항을 적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예. 조심히 하면 됩니다, 선생님.”

“흠……. 하긴 로제 양이 못 한다고 하면 솔직히 답이 없기는 하겠군요. 참 대단합니다. 나야 전하와 공녀님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로제 양은…….”

“저 또한 공녀님을 모시는 입장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로제는 주치의의 칭찬이 민망하여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지금은 제 칭찬에 기뻐할 때도 아니었다. 플리타가 병에서 회복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주치의 역시 그것을 아는 터라 더 이상 잡담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매일 이 무렵에 오도록 하지요. 참! 혹시 공녀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거나 할 경우, 공녀님의 침실 창문에 붉은색 손수건을 걸어두는 거 잊지 말고요.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감사합니다, 선생님.”

로제가 주치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주치의가 별관을 나서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공녀님? 뭘 하고 계세요?”

로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방 앞에 앉아 있는 플리타를 보고 웃으며 다가갔다. 플리타가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제의 가방을 구경하다가 그녀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으응, 그냥…… 가방 구경.”

‘열어놓지도 않은 가방을 뭐 볼 게 있다고 이리저리 살펴볼까.’

로제는 플리타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웃음을 짓고는 다시 물었다.

“왜 안 열어보시고요?”

“로제 가방이잖아. 내가 함부로 열면 안 돼.”

플리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제가 그 자그마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아이의 손이 가방을 열고 싶어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은 열면 안 되지만, 공녀님은 언제든 열어보셔도 돼요.”

“……왜?”

“으음, 공녀님은 제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니까요.”

로제가 웃으며 건넨 말에 플리타가 “와아!” 하고 박수를 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아빠는?”

“……예?”

예상치 못한 물음에 로제가 흠칫했다. 플리타는 그런 로제를 향해 거듭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아빠는 아니야? 안 소중해?”

“그, 그거야…….”

로제는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당연히 소중하죠. 공녀님만큼.”

지금은 솔직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아이와 저, 단둘뿐이니까. 다른 누가 들을 일도 없고, 괜한 소문이 날 리도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만큼은…….

“대공 전하도, 공녀님도, 제게는 똑같이 소중해요. ……제 목숨보다도 더요.”

“헤헷.”

플리타가 그 말에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번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가방을 향해 고개를 쏙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얼른 가방 열어보자, 로제. 사실은 아까부터 가방 구경하고 싶었어.”

“볼 게 없는데……. 그래요, 그럼. 그러고 나면 침대에 누워서 쉬시는 거예요?”

약을 먹어 증세가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이가 무리할 만한 행동을 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로제는 플리타에게서 약속을 받아낸 뒤, 제 가방을 열었다.

“우와아!”

아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신기할 것 하나 없는데, 플리타는 보물 탐험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방 안에 있던 것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우와! 예쁘다아!”

시골 마을에서부터 가져온 낡은 옷가지를 꺼내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를 보는 듯 감탄하는 모습에 로제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가방 안에 다시금 손을 넣은 플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은.

“어?”

“왜 그러…….”

“이거 뭐야, 로제?”

로제가 미소를 머금은 채 플리타를 향해 묻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플리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을 본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 동요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플리타가 제 손에 들린 것을 흔들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뭐야? 인형이야?”

“그…….”

로제는 어떻게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코끝이 시큰해져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로제, 이거 인형 아니야? 토끼 인형처럼 생겼는데? 음……. 아니야? 이제 보니 귀가 하나밖에 없네?”

“……인형, 맞아요. 토끼 인형이에요.”

“근데 왜 귀가 하나밖에 없어?”

플리타는 제 손에 들린 헝겊 인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가 그 인형을 물끄러미 보다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미처…… 완성하지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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