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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0화 (6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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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는 왕의 자식이기에 다양한 분야에 걸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중에는 의학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헤이번이 접했던 그 어느 서적에서도 던퍼스 병이란 것을 보지 못했다. 그를 가르친 왕실의 궁의조차도 언급한 적 없는 병이었다.

“오래전, 그러니까 대략 500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던 병입니다. 그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었기에 모두가 잊고 살았지요. 다만 제가 의학사에 관심이 있다 보니……. 송구합니다, 전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녀님의 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주치의는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공녀의 병을 알지 못하여 상황을 악화시켰으니 할 말이 없는 터였다.

“됐네. 그렇게 오래전 사라졌던 병이니……. 자네가 어떻게 아이의 병과 그 병을 연관 지을 수 있었겠나.”

헤이번은 주치의를 원망하거나 분노를 토로하는 대신,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침대 위에 누운 채 저와 주치의의 얘기를 들으며 불안해하던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헤이번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는 플리타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플리타. 꼭 낫게 할 것이니.”

“흐으, 네……. 네에. 콜록!”

플리타가 그 짧은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기침을 하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제가 눈물을 참으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바로 그 순간, 밖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문이 열렸다.

“저, 전하!”

“페드윈 경, 좀 조용히…….”

헤이번이 큰소리로 저를 부르며 뛰어 들어온 페드윈을 향해 경고조로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페드윈이 사색이 된 채 입을 열었다.

“미들피온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뷔렐 백작이 직접 보낸 것인데, 그, 후욱……. 전하께서 급히 보셔야 할 듯합니다. 공녀님과 비슷한 병을 앓는 아이들이, 후우…….”

급히 달려오느라 호흡이 고르지 못한 탓에 페드윈의 말이 자꾸만 끊어졌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헤이번이 굳은 표정으로 페드윈이 건넨 서신을 받아 펼쳤다.

“……죽었.”

서신을 읽던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으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제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그의 손에 들린 서신을 보았다. 뷔렐 백작이 보냈다던 서신은 헤이번의 손 안에서 무참히 구겨진 상태였다.

그것만 봐도 헤이번이 잔뜩 동요한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방금 하려다 중단한 말은…….

“전하.”

로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헤이번이 서신을 노려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 깊숙한 곳에서 퍼져 가는 절망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죠? 그럴 리 없잖아요. 우리 플리타가, 우리 아이가…….’

“주치의가 다시 진료를 봐야 하니 모두 나가도록 하지.”

헤이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는 플리타를 향해 몸을 반쯤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나가 있겠다, 플리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주치의의 신경이 분산되거든. ……괜찮지?”

“……나가요? 로제도?”

플리타가 두려움 가득 담긴 시선으로 로제를 찾았다. 로제가 서둘러 다가와 아이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진료 보시는 동안, 준비할 게 있어서요. 공녀님 옆에 계속 있으려면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는데.”

“내, 콜록! 내 옆에 계속? 콜록, 계속 있어?”

“물론이죠.”

로제가 울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마음이 한결 놓이는지 희미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 콜록! 알았어. 빨리 와야 돼?”

“예, 공녀님. 금방 다녀올게요.”

로제는 아이에게 단단히 약속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헤이번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페드윈을 비롯하여 방 안에 있던 고용인들이 따라 나갔다.

로제가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방을 나섰다. 그녀는 복도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주치의와 단둘이 남은 아이의 작은 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움츠러들어 있었다.

로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헤이번만이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간 듯했다.

“전하, 미들피온에서 온 서신에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질문부터 던졌다. 사실, 일개 하녀가 제 주인에게 할 질문은 아니었다. 주인에게 온 서신의 내용을 묻는다니 말이다. 큰 무례였기에 벌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로제는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플리타가 우선이었다. 헤이번 역시 로제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묻지 않았어도 자신이 이야기했을 터였다.

“미들피온에서 괴질이 번졌다고 하더군. 뷔렐 백작으로서는 그 병이 던퍼스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야. 하기야 일반 치료사들로서는 오래전에 잊혀진 병을 알아낼 수 없었겠지. 나도 처음 들었고…….”

“그래서요? 병에 걸린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나요?”

로제는 급한 마음에 헤이번의 말을 가로막고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헤이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침묵에 다시금 그를 재촉하려던 로제의 눈에 헤이번의 손이 들어왔다.

손등의 핏줄마저 튀어나올 정도로 힘주어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이.

“…….”

로제가 그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남자의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그의 마음은,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까.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이 그럴 테니까.

그저 치료가 잘 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그럴 테니까.

더구나 그는 혼자였다. 플리타에게는 헤이번이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 두 사람의 몫을 그가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 이 남자가 느끼고 있을 고통의 무게가 어떠하겠는가.

로제가 가슴속이 미어져 저도 모르게 옷 앞섶을 움켜쥔 순간, 헤이번이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살아남은 아이가 없다더군. 그때, 우리가 치료사에게 데려다주었던 소년마저도 증세가 나아지는 것 같다가 급격히 악화되어 죽었고.”

“…….”

로제가 참담한 소식 앞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헤이번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뷔렐 백작이 그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신을 보냈나 봐. ……플리타가 그, 죽은 녀석과 가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하더군.”

평범한 복장으로 위장했다고 하여 모든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뷔렐 백작의 서신만으로는 아이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없기에.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주치의였다.

“아, 전하.”

“아이는?”

“일단 열을 낮추는 약과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편안해지셨는지 잠드셨습니다.”

“아아……. 다행이군.”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치료가 어렵다고는 해도 아이의 고통이라도 덜어주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헤이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금 들려온 주치의의 말에 시선을 던졌다. 주치의가 말하기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공녀님을 이곳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뭐라고?”

헤이번의 표정이 굳었다. 로제 역시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주치의를 보았다.

“전염되는 병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공녀님을 다른 곳에 격리하여야 합니다.”

“격리?”

“예, 전하. 공녀님의 시중을 들 사람을 한 명 정도 함께 들어가게 하고, 완치될 때까지는 결코 외부로 나오지 못하게…… 그리하셔야 합니다.”

“그게, 그게 무슨……. 어린아이를 가둬두자는 건가?”

“그렇게 해야 더 이상 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대공 저 내에 병이 퍼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 하녀도 그렇고, 아니, 대공 전하부터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치의는 로제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금 헤이번에게 단호히 말했다.

“감기 증세가 있는 이들을 파악하여 이들 역시 별도의 공간에 격리시키십시오. 그리고…….”

헤이번이 주치의의 말을 듣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단정하던 머리가 금세 헝클어져 이마 위를 덮었다.

주치의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건 잘 아는 바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명을 내려야 할 터였다. 그런데 생각처럼 그게 쉽지 않았다.

아이를 격리시킨다니.

대체 어느 곳으로 아이를 보낸단 말인가.

가뜩이나 아픈 아이를, 시중들 사람 하나 붙여서 가둬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을 아는지, 목소리가 잠겨 나오지 않았다.

“그…….”

“제가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헤이번의 입이 열리기 직전, 로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이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가 단호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반복하여 말했다.

“공녀님과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돌봐 드릴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팔도 불편할 텐데 굳이 네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아픈 아이를 돌보는 건 주치의의 보조로 일하는 하녀가 더 잘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이의 유모가 들어가도…….”

“팔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공녀님과 함께 미들피온에 다녀온 사람이 저예요, 전하.”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 제가 들어가는 편이 여러모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병에 노출될 일이 적었던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또 하나의 위험을 추가하는 것보다는요.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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