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9화 (59/134)

59

“……휴우.”

로제는 붕대를 꼼꼼하게 묶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팔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는 일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이러다가 익숙해질 때가 되면 붕대를 풀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녀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붕대와 가위 등을 치웠다.

한 손으로 무엇이든 해야 하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씻는 것도 그렇고, 옷을 갈아입거나 몸단장을 할 때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혼자 부목을 대고 붕대를 묶는 일이 어려웠다. 특히 붕대를 감아 마무리를 할 때 말이다. 두 손으로 매듭을 지어 묶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항상 낑낑대며 한 손과 입으로 붕대를 묶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시찰을 다녀온 뒤, 유모의 태도는 더욱 쌀쌀맞아졌다. 툭하면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타박하는 일도 많아졌고, 저를 향한 폭언도 점점 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대공 저의 다른 고용인들 역시 로제를 더욱 멀리했다. 본래도 느닷없이 들어온 그녀를 배척하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뭐랄까…….

‘……질투? 시기?’

“……말도 안 돼. 내가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로제는 스스로도 제 생각이 어이없어 피식 웃은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둑한 와중에 붕대를 감느라 켜 두었던 램프를 끄고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쌀쌀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여행을 다녀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계절이 어느새 성큼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기침이 좀 잦아들었어야 할 텐데…….”

쌀쌀한 날씨에 로제가 몸을 살짝 옹송그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담겼다. 시찰 여정 끝자락에 생긴 플리타의 감기 증세가 대공 저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낫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감기가 이렇게 낫지 않는 건지.’

로제는 계단을 오르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감기가 아니라던 주치의도 이제는 말을 바꿔 감기라 진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차도를 보여야 할 터였다.

똑똑.

로제는 플리타의 침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지 방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이른 시간이니 당연했다.

그래도 예의상 노크부터 한 그녀는 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훈훈한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복도의 냉기가 침입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벽난로의 불꽃은 밤새도록 제 역할을 해 주었다.

로제는 벽난로 안에 장작을 몇 개 더 넣은 뒤, 플리타가 잠든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침대 옆 방석 위에서 잠을 자던 강아지가 인기척에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하양아.”

미들피온에서 데려온 영특한 강아지는 제 주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짖지 않고 꼬리로만 인사를 건넸다. 로제가 기특한 마음에 허리를 숙여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다시 침대 쪽을 보았다. 플리타가 이불을 폭 덮은 채 자고 있는 것인지 아이의 작은 머리통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의 동그란 이불을 가만히 보며 미소 짓던 로제가 몸을 돌렸다. 플리타가 일어나기 전에 이것저것 해 놓아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일단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따끈한 물부터 한 잔 주고…….

“콜록!”

그 순간, 뒤편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전날 밤보다 아이의 기침 소리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콜록, 콜록!”

그것이 옳다는 듯 아이가 연거푸 기침을 했다. 로제는 황급히 돌아서서 침대로 재차 향했다.

“공녀님?”

로제가 작은 목소리로 플리타를 불렀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깊이 잠들어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공녀님?”

“콜록콜록! 흐으……. 으응, 로, 콜록! 로제에에…….”

로제가 재차 플리타를 부르자 심한 기침 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이불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이불을 걷고 플리타를 살폈다.

“고, 공녀님!”

아이의 온몸이 불덩어리 같았다.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린 것인지 플리타의 잠옷뿐만 아니라 이불과 시트도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로제, 흐아앙. 나…… 나 너무 아, 콜록! 아파아아.”

플리타가 가까스로 눈을 반쯤 뜨더니 로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제는 플리타의 뜨거운 몸을 끌어안고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시 아이를 침대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니 플리타를 안아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길 수조차 없어서였다.

“자, 잠시만요. 공녀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흐윽, 으응.”

플리타는 울먹이면서도 로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오한이 일어서인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일단 침대 시트와 이불부터 갈아야 했다. 젖은 이불은 되레 아이의 체온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한쪽 팔로 하기는 힘드니까 다른 하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어. 그리고 주치의를 부르고, 헤이번에게도 알려야…….’

“아, 아파. 로제, 나 이상해. 여기, 이렇게 빨간 점도 막 생기고. 콜록!”

그 순간, 플리타가 울먹이며 한 말이 로제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로제가 모든 동작을 그대로 멈추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아닐 거다.

그럴 리 없다.

‘……아닐 거야. 주치의도 별말 없었고. 그냥, 감기라고.’

로제의 기억 속에서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침과 고열 증세를 보이고, 발진이 생겼던.

미들피온에서 축제 구경을 나갔다가 플리타의 앞에서 쓰러진 소년.

그래서 자신들이 치료사에게 직접 데려가 치료를 맡겼던…….

“공녀님!”

로제는 황급히 침대로 달려갔다. 플리타가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며 로제에게 제 팔과 다리를 보여주었다.

불긋불긋 열꽃이 핀 것처럼 아이의 팔과 다리가 얼룩덜룩했다. 흡사 미들피온에서 보았던 소년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로제는 입이 바싹 마른 채 창백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콜록! 나 여기도 아픈데, 흐잉.”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제 명치 아래로 가져갔다. 그것 역시 소년과 똑같았다. 로제는 치료사의 손이 닿자마자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던 소년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도 이 비슷한 증세를 보인 아이를 치료한 적이 있소. 이 녀석보다는 증세가 덜 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비슷하구려.」

비슷한 증세를 보인 아이. 그리고 역시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플리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병이 전염성이 있다는.

“걱정 마세요, 공녀님. 지금 바로 주치의를 부를게요. 대공 전하께도 말씀드릴 테니까.”

“흐엉, 흑. 흐윽.”

‘밤새 혼자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로제는 아이를 달래며 치료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뭐, 정확히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증세를 완화시키는 약을 쓰면 될 거요. 지난번 꼬마도 그랬으니까.」

‘그래.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수도에 비하면 작은 영지인 미들피온의 치료사도 고친 병을, 대공 저의 주치의가 고치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녀는 간절한 바람으로 스스로를 세뇌하듯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 * *

“플리타는?”

헤이번은 무섭게 굳은 낯빛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주치의가 플리타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그를 보고는 예를 표하려 했다. 헤이번이 주치의를 향해 손을 내저은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어떤가?”

“예, 기침에 고열, 그리고 발진이 생겼고……. 명치 아래 통증이 있습니다.”

“그건 이미 보고 받았다. 무슨 병이지? 치료는 가능한 건가?”

헤이번은 주치의를 향해 재촉하듯 물었다. 주치의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던퍼스 병인 듯합니다.”

“던퍼스?”

생소한 이름이었다. 헤이번이 미간을 좁힌 채 주치의의 말을 따라하고는 다시 질문했다.

“그게 뭐지?”

“전염병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뭐? 그게 무슨 말인가?”

“던퍼스 병은 처음에는 감기와 흡사하여 진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지나고 나면 그 진행 속도가 급격히 빨라져 중증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치료가 어렵고, 설령 약을 써서 증세를 가라앉힌다고 하더라도 금세 상태가 심각해져서…….”

주치의가 병에 대한 설명을 하는 사이에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헤이번 역시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의 말을 듣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대공의 그런 반응을 본 주치의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참담한 투로 말을 내뱉었다.

“……어린아이의 경우, 열에 아홉은 사망하는 병입니다.”

로제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헤이번이 주치의의 말을 듣다가 냉큼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죄, 죄송합…….”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네가 먼저 쓰러질 참이냐.”

타박하듯 건넨 말과 달리 로제를 붙잡은 그의 손은 휘청거리던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의지가 되었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아이보다 어미인 자신이 먼저 쓰러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로제가 헤이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입술이 찢어지면서 피 맛이 느껴졌다. 헤이번이 그녀의 표정이 단단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주치의를 돌아보았다.

“던퍼스 병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이 발진의 모양과 명치 아래의 통증이 모두 그 병의 대표적인 특징이지요.”

“그런 심각한 병이 있는데, 왜 알려져 있지 않은 거지? 그 어떤 의학 서적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