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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8화 (5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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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가 헤이번의 말을 듣다가 깜짝 놀라 플리타를 쳐다보았다. 혹여 플리타가 잠결에 잘못 듣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헤이번이 다시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오해하고, 그 뒤부터는 플리타를 더 함부로 대할 거라는 뜻이다.”

“저는…….”

“반대로 내가 너에게 큰 상을 내린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플리타의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쓰겠지.”

“…….”

로제는 침묵했다. 어미가 없는, 아니, 귀족인 어미가 없는 아이의 삶이 어떠한지 곁에서 지켜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대공의 딸이기에 ‘공녀님’이라 부르며 떠받드는 척하지만, 한편으로는 천한 어미의 핏줄을 물려받았다고 수군대는 말들이 제 귀에도 들렸다. 하다못해 유모조차도 플리타를 함부로 대할 때가 있지 않던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건가요?”

로제가 다시금 헤이번을 쳐다보며 물었다. 헤이번이 무슨 질문인지 되묻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아이의 귀를 손바닥으로 살며시 감싸고는 아주 작게 말을 이었다.

“공녀님에 대한 사람들의 말을요.”

“……사람들이 뭐라 하나?”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기에 제게 그리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공녀의 지위가 확고하다면 굳이 이런 이야기가 오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낱 하녀에게 공녀의 목숨을 구한 사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공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변할 리 없지 않겠는가.

즉, 그 말 자체가 플리타의 불완전한 지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로제는 헤이번에게 그 점을 말하고 싶었다.

“아시면서, 어째서…….”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헤이번은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그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내 유일한 자식이야.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뭘 더 해야 하나.”

“공녀님께 함부로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벌이라도 내리라고? 그런다고 플리타를 낳은 이의 출신이 바뀌나? 이 아이가 사생아란 사실이 사라지나?”

헤이번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아이를 보는 그의 푸른 눈이 일그러졌다.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다. 이 아이의 핏줄에 대한 온갖 더러운 말들은.”

“……전하.”

“지금은 어리니까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그래서 제 출생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상처 받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대신 벌을 내리고 아이를 보호해야 하나? 저 홀로 서지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라고?”

헤이번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로제를 보았다. 어째서인지 저를 보는 로제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하녀에게 동정이라도 받는 건가. 그는 우습단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무관심한 아비였다는 건 인정해. 사실, 기억에도 없던 아이를 내 아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

그래서일까. 그는 제 속을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텅 비어 있던 제 가슴속을. 자신의 딸조차 온전히 가슴에 품어주지 못했던 냉혹한 아비인 저를.

“아기 침대 안에서 홀로 꼬물거리는 플리타를 보면서도, 칭얼거리는 아이를 보면서도 안아서 달래줄 생각은 들지 않더군. 정말 내 애가 맞기는 한 건가 의문도 들었고.”

‘……혹시 선왕비가 무슨 거짓 수작을 부린 건가 싶어 경계도 하게 되었고.’

헤이번은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털어놓는다고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전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선왕비와 관련해서는.

저와 혼인하려 하는 제 형수란 여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 앞이라면 몰라도, 로제 앞에서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는 여인과 함께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각난다면 달랐을까.”

“…….”

“뭐, 지금에 와서는 아이를 방관한 못난 아비의 변명일 뿐이지.”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로제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이 난다고 하셨잖아요? 환청을 들으셨다고.”

지난번에 나누었던 대화를 언급했다. 헤이번은 로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 안 됐어. 그 환청을 들은 건. ……그래, 네가 대공 저에 들어온 뒤로 듣기 시작한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헤이번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와 닮은 눈동자 색깔,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여자의 분위기 때문일까.

그런 점들이 제 머릿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던 기억의 파편을 끄집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일 테죠.”

“당연히 우연이겠지. 어쨌든 사례는 받도록 해. 받고 싶은 게 없다면 내가 알아서 주도록 할 테니까.”

헤이번이 다시금 화제를 전환했다. 로제는 굳이 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플리타를 위해서라는데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저 가슴속이 조금 더 무거워졌을 뿐이다.

그가 홀로 겪었을 외로움이 가슴 사무치게 느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의 그 텅 빈 가슴속이 얼마나 시렸을지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그의 기억을 잃게 만든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것이 선왕비의 강요로 인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참, 주치의가 걱정할 건 없다고 하더군.”

“……예?”

로제는 다시금 들려온 헤이번의 목소리에 잡념을 털어내고 그를 쳐다보았다.

“팔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 외에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했어. 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아……. 예에.”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제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로제는 자신의 부러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부목을 대 놓은 팔이 어쩐지 낯설고 이상했다.

제 팔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데,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타박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일이 아니었어, 로제. 정말 큰일날 뻔했다고.”

“……뭐,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로제가 아무러면 어떤가 하는 마음에 무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살아 있으니까 됐다.

아이가 무사하니까 됐다.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인지, 헤이번이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플리타가 조금만 아파도 난리를 치면서, 정작 본인의 몸에는 관심이 없군.”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 않다고? 그 비쩍 마른 몸에 살을 찌운다면 믿어주지.”

헤이번이 농담처럼 덧붙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몸이 약하다고 하더군.”

“……!”

로제의 차분하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그녀는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들킨 양 허둥대며 말을 꺼냈다.

“아, 그건, 어, 요즘 좀 피곤해서…….”

“본래 약하게 타고난 게 뭐 그리 죄가 된다고 놀라는 거지?”

헤이번은 로제의 과한 반응에 되레 미간을 좁혔다. 로제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혹시라도 불쾌해하실까 봐요. 제 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공녀님을 어찌 돌보겠나, 하실 수도 있고요.”

“됐어. 제 몸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플리타를 벌써 두 번이나 구했나?”

헤이번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문득 로제가 그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기억 속 누군가를 보듯. 그리움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왜 그렇게 보지?”

“아니요. 그냥……. 전하께서 편히 웃으시는 게 보기 좋아서요.”

‘……편히 웃었다고?’

헤이번은 로제가 웃으며 대꾸한 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그러고 보니 제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진 것도 같았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새삼 귓가에 닿았다. 벽난로의 불꽃이 커지기라도 한 걸까. 그는 갑자기 몸이 더워진 이유를 그렇게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흐흠, 그럼 밤이 늦었는데 자도록 해. 푹 자야 몸도 회복이 잘 될 테니까.”

헤이번이 당혹스러운 마음에 다시금 말을 돌리자 로제가 덩달아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깜빡 잊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제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됐어. 움직이지 마.”

그는 로제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는 걸 서둘러 막은 뒤,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자도록 해.”

“하지만 이 방은 전하의 침실인데, 제가 어떻게……. 아니,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요.”

로제는 아까 건넸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헤이번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데려왔으니 이곳에 있지.”

“저, 전하께서요? 저를 데려오셨다고요?”

그를 쳐다보던 로제의 눈이 문득 아래로 움직였다. 헤이번의 셔츠 소매에 피가 묻어 있는 게 뒤늦게 보였다. 어두운 터라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런……. 옷을 갈아입는다 하고, 깜빡 잊었군.”

로제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눈치챈 헤이번이 난감한 투로 중얼거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나아가 그녀가 계속 자신을 그렇게 봐 주었으면 하는…….

‘또, 또 미친 생각.’

헤이번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정말 자도록 해. 밤이 너무 늦었어.”

“하지만 전하께서는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뭐……. 소파가 푹신해서 좋더군.”

“예? 어, 어떻게…….”

헤이번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로제를 뒤로한 채 소파로 향했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더 이상 뭐라 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기척만이 느껴졌다.

잠시 후, 로제가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은 눈을 감은 채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

편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껏 살면서 보낸 밤 중에 가장 따뜻하고 안온한 밤이 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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