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쌔근쌔근 자는 아이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로제는 어둠 속을 헤매며 그렇게 생각했다. 꿈이 아니고서야 제게 이런 행복한 순간이 허락될 리 없었다.
포근한 공기. 곤히 잠든 아이의 숨소리.
……그리고 제 손을 잡고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
‘……누군가의 손이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다시 눕히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 팔도 부러진 데다가 몸 상태도 아직 온전하지 않으니까.”
“누, 누구……. 전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처음에는 누가 제게 말을 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당황한 탓에 이미 알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야 했다. 그러나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헤이번.’
그녀는 제 앞에 있는 그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왜, 당신이……. 어째서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나요? 정말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쯧.”
그 순간, 헤이번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혀를 찼다.
“그것 봐. 섣불리 움직였더니 아프잖아. 눈물까지 흘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행동은 그녀를 더욱 경악하게 했다. 바로 헤이번이 직접 손수건을 들고 로제의 눈물을 닦아준 것이다.
“……!”
“많이 아픈가?”
헤이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저를 바라보는 로제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멍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큰 사고를 겪었으니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으리라.
그는 나름대로 그녀의 상태에 대해 납득한 뒤,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로제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그녀의 입이 열렸다.
“고, 공녀님은요? 공녀님은 무사하신가요?”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다. 헤이번은 로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플리타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할 거라 예상했던 게 맞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헛웃음을 지었다.
“전하, 공녀님은…….”
“무사하다. 네가 플리타를 감싸고 보호한 덕분에. 지금 여기서 자고 있지.”
헤이번이 로제의 거듭된 질문에 대답을 하고는 눈짓으로 제 무릎 위를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 로제의 눈이 움직였다. 그리고 헤이번의 무릎에 앉은 채 쌔근쌔근 자고 있는 플리타에게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 나왔다. 아이가 다친 데 없이 무사하다는 것에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로제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플리타를 살피려고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냥 누워 있으라니까.”
“하지만…….”
로제는 말을 하다가 인상을 썼다. 목구멍이 바짝 마른 터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헤이번이 그런 로제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 물을 가져다줄 테니.”
그는 이 소란에도 불구하고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 올려 로제가 누운 침대 한쪽에 뉘었다. 침대가 워낙 넓은 터라 로제와 플리타, 두 사람이 누워도 공간이 넉넉했다.
‘설마…….’
로제는 제 곁에 누운 플리타를 살필 새도 없이 문득 찾아든 깨달음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제 침대가 아니었다. 또한 플리타의 침대도 아니었다. 그녀는 물을 가지러 간 헤이번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터라 눈에 익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곳이 제 방도 아이의 방도 아니란 점이었다.
오히려 지난번에 함께 차를 마셨던 헤이번의 객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과 서너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법한 침대.
‘맙소사. 그의 침실이야?’
로제가 깜짝 놀라 아픈 줄도 모르고 일어나 앉았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물병과 컵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그녀를 보고는 혀를 찼다.
“가만히 있으라 했더니, 말을 참 안 듣는군. 플리타보다도 더 말을 안 들어.”
“저, 전하. 제가 왜…… 전하의 침실에.”
농담처럼 건넨 말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웃지 못했다. 그저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헤이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일단 물부터 마시지.”
“……예?”
“먹여줄까?”
컵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로제를 향해 헤이번이 다시금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그제야 로제가 얼굴을 붉히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내밀려고 했으나 부러진 팔의 통증에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헤이번이 앓는 소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떠는 로제를 보고 컵을 내려놓은 뒤,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의식할 새 없이 그녀의 등과 어깨를 쓸어내렸다.
“괜찮아?”
“……헤, 으윽, 예에.”
로제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함께 살 때 자신이 몸살이 나거나 조금 아프면 그가 이렇듯 등과 어깨를 쓸어내려 주고는 했다. 그럼 신기하게도 아픈 게 가라앉아서, 가끔은 농담처럼 그의 손이 ‘약손’인가 보다 하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을 애써 떨쳐버리며 그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괜…… 괜찮아요. 이제.”
“정말 괜찮아?”
“예.”
“그럼 다행이고. 내 손이 ‘약손’이라도 되나.”
헤이번은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고는 괜히 한 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가냘픈 몸이 주던 감각이 선명히 남은 탓이었다.
‘미친놈.’
아픈 사람을 두고 그게 할 생각인가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낯이 뜨거워진 탓에 그는 평소 하지도 않던 싱거운 농담마저 입에 담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가 그의 말에 웃는 대신, 멍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약…… 약손요?”
“왜? 아닌 것 같아? 이제 괜찮다면서, 그럼 내 손 덕분이지.”
헤이번은 머쓱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괜히 너스레를 떤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협탁 위에 잠시 놔두었던 컵을 집어 들면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제 얼굴이 분명 벌겋게 달아올랐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뜨끈뜨끈 달아오른 게 느껴지니 말이다.
“……후우.”
헤이번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금 몸을 돌렸다. 로제가 그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내가 먹여 주는 편이 낫겠어.”
“아, 아닙니다, 전하. 제가 마시겠…….”
“됐어. 팔도 부러졌으면서. 미처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야.”
헤이번은 로제가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들려는 것을 막은 뒤,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주고 다른 손으로 든 컵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
어둠 속인데도 로제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게 또렷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그가 해 주는 대로 컵에 입을 댔다.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게 문득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입이 작은 편이군.’
헤이번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몸 한쪽에서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헛기침을 했다. 물을 다 마신 로제가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살짝 닦다가 그를 보고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감기 기운이 있으신가요?”
“아니다. 이건 그냥…….”
네 입술이 오물거리는 걸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런 미친 얘기를 어떻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헤이번은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고는 빈 컵을 다시 협탁에 내려놓았다.
“공녀님께서도 기침을 하셨는데…….”
로제가 제 옆에 누워 잠을 자는 플리타를 보다가 제 이불을 덮어주려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게 쉽지 않았다. 부러진 팔을 쓰지 못하고 다른 팔 하나로 이불을 끌어당기려 하니 말이다.
“내가 하지.”
헤이번이 그 모습을 보고는 냉큼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불을 잡고 있던 로제의 손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아…….”
갑자기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둑어둑한 침실 안에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헤이번과 로제,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문득 의식되었다.
“……참, 인사가 늦었군. 고맙다, 로제.”
헤이번이 어색한 분위기를 깰 겸 말을 돌렸다. 로제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플리타의 몸 위에 덮어준 이불을 꼼꼼히 눌러주다가 그를 보았다.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로제가 그의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부러 꾸며낸 가식이 아닌, 진심이 담긴 모습이었다.
공녀를 구하였다는 공을 내세울 생각도 없고, 그를 통하여 뭔가 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모두가 너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지.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고.”
“…….”
“그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혹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니요.”
로제가 민망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사례 운운하는 얘기가 나오자 고개를 들더니 단호한 투로 사양했다.
“공녀님께서 무사하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공녀님을 구한 일로 다른 대가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로제는 애틋한 손길로 플리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것을 봤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생각을 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뛰어나갔다고 해야 할 터였다.
아이가 그 커다란 샹들리에에 깔리지 않았으니 되었다. 이 작은 몸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구한 대가를 받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제대로 엄마 노릇도 못 해주었는데.
그 순간, 헤이번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플리타를 위하여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
“공녀를 구하였는데도 아무런 사례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아, 대공이 본인의 딸을 아끼지 않는구나. 사랑하지 않는구나.”
“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