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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6화 (5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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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로제의 말이 그제야 생각난 아이가 잠시 울먹이며 침울해하다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 몰래 나가서 로제랑 방에 돌아가야지. 가서 하양이 밥도 주고, 같이 놀고.’

플리타는 언제 울먹였나 싶게 작게 웃은 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두가 각자 만찬을 즐기거나 대화를 나누느라 제 시야에 닿지 않는 자그마한 아이 하나가 나가는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헤이번 역시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터라 플리타를 미처 보지 못했다.

플리타가 만찬장 구석에서 출입문 쪽으로 가던 도중, 문득 아이의 머리 위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아이의 발아래 그림자가 크게 일렁였다.

“……어?”

플리타가 제 발밑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로제가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다가 만찬장 안을 기웃거렸다. 출입문 근처에 서 있는 플리타가 보였다. 아이는 천장에 뭐가 있는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로제는 플리타가 올려다보는 천장 쪽으로 시선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플리타가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하다가 저를 보는 로제와 눈이 마주치자 반색했다.

“로제!”

플리타가 환하게 웃으며 로제를 부른 순간, 다시 한번 위에서 삐걱거리며 소리가 났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열린 문 사이로 플리타를 보던 로제조차 들었을 정도로.

로제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불길함을 느끼고는 천장을 보았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게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바로 밑에 제 아이가 있었다.

“플리타!”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녀라 호칭을 붙여야 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다급히, 그녀가 비명처럼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만찬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만찬장의 커다란 샹들리에가 떨어진 것과 로제가 플리타를 향해 몸을 던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찬장 한쪽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헤이번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

콰쾅!

“꺄악!”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낸 굉음과 함께 근처에 있던 이들의 비명 소리가 만찬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샹들리에 밑으로 가냘픈 여인이 깔려 있는 게 모든 이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피가 그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헤이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가슴이 조여 오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은 몸을 억지로 끌고 그곳으로 급히 다가갔다.

플리타.

……로제.

제 사랑하는 아이, 그리고…….

그리고.

그때, 마치 헤이번을 부르듯 여인의 품 속에서 아이가 꿈틀거리며 나오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앙! 아빠아! 로제, 로제가아아!”

피로 범벅이 된 플리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로제를 끌어안고 있다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헤이번을 향해 새빨개진 손을 뻗었다.

* * *

“그 커다란 샹들리에가 떨어졌는데……. 이건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공 저의 주치의는 로제의 상태를 진료한 뒤,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비록 팔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숨과는 관련이 없으니 말입니다. 골절된 팔이야 그 뼈가 제대로 붙을 때까지 부목을 대고 있으면 될 테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께서 직접 도우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런데 괜찮은 건가?”

헤이번이 주치의의 말을 가로막고 질문을 던졌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주치의는 그런 헤이번이 생경한 듯 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물론 그 점이 조금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그냥 잘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몸이 본래 약한 것 같으니 거기에 맞는 약을 지어 올리지요.”

“부탁하네.”

헤이번은 주치의의 말에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가 그런 헤이번을 쳐다보다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흐읍, 그럼 이제 로제, 괜찮은 거예요?”

침대 아래쪽에서 자그마한 머리통이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플리타가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훌쩍이다가 일어난 것이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번쩍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평소였다면 제 아비의 무릎 위에 앉았다고 깜짝 놀랐을 텐데, 아이는 로제에게 온 신경을 쏟은 듯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헤이번이 쓴웃음을 지은 뒤, 플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치의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다.”

“……근데 왜 계속 자요?”

플리타가 로제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놀랐으니까. 아프기도 할 테고.”

“……나 때문이에요. 로제가 나 구하느라고. 내가, 흐윽, 샹들리에 밑에 있어서. 밖에 나가려고 안 했으면, 아빠랑 약속한 대로 가만히 제자리에 있었으면…….”

“플리타.”

헤이번은 플리타를 돌려 앉혀 저를 보게끔 했다. 플리타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치만…….”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샹들리에 관리를 허술하게 한 담당 하인의 잘못이고, 그를 고용한 백작가의 잘못이지. 너는 그저 우연히 샹들리에 아래에 있었을 뿐이고, 로제는 그런 너를 구하고자 뛰어들었을 뿐이다.”

헤이번의 목소리는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어린 딸이 괜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지 않도록 아이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는 최대한 느리게, 제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아이에게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훌쩍이던 플리타가 서서히 울음을 그치더니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나 때문인 거 아니에요?”

“그래.”

“……로제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만약 나 때문에 다쳤다고 화를 내면.”

“로제가 그럴 사람이니?”

헤이번은 아이의 말을 듣다가 질문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래. 로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오히려 네가 무사한 것을 기뻐할 거다. 네가 무사하고 본인이 다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본 적 없다. 제 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말이다. 아니, 설령 제 자식이라 할지라도 이렇듯 몸을 날려 아이를 감싸고 본인을 위험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헤이번이 다시금 시선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가뜩이나 파리한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몸이 너무 약해.”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알아들은 플리타가 헤이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로제한테 좋은 약 많이 주세요.”

“그래.”

“건강하게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도록, 콜록!”

플리타가 헤이번에게 부탁을 하다 말고 기침을 했다. 헤이번이 아이의 기침 소리에 인상을 썼다.

“감기 기운이 있는 거냐?”

“아니요. 주치의가 감기 아니랬어요.”

“그런데 왜 기침을……. 어디 열이 있나 보자.”

헤이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다행히 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다시 손을 거두려는 순간, 플리타가 냉큼 그의 손을 잡더니 입을 열었다.

“아빠.”

“응?”

“로제한테도 해 주세요.”

“……뭐?”

“이마에 이렇게요. 아빠가 이마에 손 얹어 주니까 안 아픈 거 같아요.”

“원래도 아프지 않다면서.”

“으응. 더 안 아프다고요. 그러니까 로제도요, 아프지 말라고 이마에 이렇게 해 주세요.”

플리타가 헤이번의 손을 잡아끌었다. 헤이번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가 제게 이렇듯 투정을 부리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투정이 제 전담 하녀의 이마에 손을 대 달라는 것이니…….

“플리타, 이건 좀…….”

“로제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난처해하며 말을 꺼내던 헤이번의 눈에 다시금 울먹이는 플리타가 들어왔다.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어쩔 수 없이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제의 이마 위에 닿을 듯 말 듯 헤이번의 손끝이 스쳤다. 하지만 쉽게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정신이 없는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그저 이마일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빠아아…….”

그러나 제 무릎 위에 앉아 자신의 손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딸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헤이번은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로제의 이마 위에 손을 댔다.

“…….”

순간적으로 헤이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로제의 이마가 너무나 차가웠다. 그는 로제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시선을 돌려 그녀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혹시 오한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물론 주치의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니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꼼꼼히 살폈다. 혹여 주치의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으응…….”

바로 그때였다. 로제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헤이번의 손을 붙잡은 것은.

“……!”

헤이번이 미처 손을 뺄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평소라면 쉽게 손을 빼냈을 터였다. 기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인의 몸놀림에 자신이 뒤처질 리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가 그의 손을 잡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의 몸 상태를 살핀답시고 거기에 집중하느라 방심한 탓인 듯했다.

“우와, 아빠랑 로제랑 손잡았어!”

가뜩이나 당혹스러운 상황인데, 플리타는 신난다는 듯 밝게 외쳤다. 헤이번이 황급히 아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쉿, 플리타.”

“참! 로제 깨면 안 되지.”

플리타가 헤이번의 말에 냉큼 제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눈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걸 보니 기쁜 모양이었다.

“……으응.”

그 순간, 로제가 헤이번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헤이번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통증에 시달리느라 찌푸려졌던 미간도 펴진 상태였다.

‘다행이기는 한데…….’

헤이번의 시선이 다시 제 손으로 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라 해야겠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속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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