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5화 (5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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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뷔렐 백작은 헤이번과 플리타를 테이블의 가장 상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이 안내 받은 자리에 앉은 뒤, 이어서 다른 귀족들도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백작이 마련한 만찬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급히 열린 만찬회라 믿기 힘들 정도로 훌륭하다고 해도 좋았다. 대공을 위한 자리였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난번 추모식 때는 미처 뵙지 못하여…….”

“전하, 맥그리안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희 영지에서 광산을 개발하고 있는데…….”

만찬을 갖는 내내 수많은 귀족들이 헤이번의 주변을 맴돌고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중에는 불필요한 사담도 있었지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사업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그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바로 제 곁에 앉아 있는 플리타 때문이었다. 로제가 함께하지 못하니 아이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저 하나뿐이기에…….

“아빠.”

그 순간, 플리타가 포크를 든 채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불렀다. 동시에 주변에서 저마다 제 얘기를 하느라 떠들던 귀족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 적막 속에서 헤이번이 아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

“아니요. 맛있어요.”

플리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연녹색 눈을 살짝 굴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그래, 다 컸구나.”

헤이번은 뜬금없는 얘기에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이내 어색한 투로 아이를 칭찬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 꼬마가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칭찬을 받으려고 한 얘기가 아니라는 듯 살짝 인상을 쓰더니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아빠, 다른 분들이랑 편히 대화 나누셔도 돼요.”

“뭐?”

“저쪽에 남자 귀족들을 위한 휴게 공간이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 가셔서 편하게 대화하세요.”

헤이번은 아이의 말에 말문이 막혀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보통 다섯 살이 이런가?’

그는 문득 로제에게 묻고 싶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지 않은 그녀에게 물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허허. 공녀님께서 참 대견하십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딸이라니요.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에 이 정도로 철이 들었더라면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헤이번의 주변에 몰려와 있던 귀족들 중 나이가 제법 든 귀족 하나가 껄껄 웃으며 플리타를 칭찬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 역시 그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이렇게 철이 드셨는지.”

“역시 괸터스의 핏줄이신 게지요. 고귀한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플리타는 지금껏 거의 들어보지 못한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게 낯선 모양인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아이를 보던 헤이번이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말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예, 근데 혼자 아니에요. 저쪽에 있는 언니, 오빠들이랑도 놀 거예요.”

플리타의 말에 헤이번이 만찬장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이보다 서너 살, 혹은 그 이상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함께 모여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흠……. 그래, 그럼 잠시 자리를 비우마.”

헤이번이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서니, 플리타가 그를 안심시키려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헤이번이 자리를 뜬 뒤, 힐끔대며 저들끼리 눈짓만 주고받던 귀부인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어린아이가 끼어들 수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플리타는 서둘러 디저트를 다 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제 아비에게 말했듯이 소년, 소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저기…….”

뷔렐 백작의 딸인 아델라가 주축이 되어 아이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하였으면서도 짐짓 어른 흉내를 내려는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귀족 아이들 몇 명의 시선이 플리타에게로 향했다.

“어머, 공녀님.”

아델라가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플리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다른 귀족 아이들도 덩달아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하자거나 놀자는 말은 없었다. 하다못해 아이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 탓에 플리타는 모두가 앉아 있는 와중에 홀로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그런 아이를 힐끗대며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귀족 아이들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스쳤다.

“저기, 저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플리타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귀족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자리를 슬쩍 내주었다. 플리타가 그에 안심하여 미소를 지은 뒤,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았다고 하여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상기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듣던 플리타의 얼굴이 서서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제 아빠에게 말한 대로 혼자서도 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

아이가 대화 속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귀족 아이들 중 누군가가 힐끗 플리타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공녀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예? 네에! 물론이에요!”

플리타는 제게 말을 걸어준 아이가 고마워서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아이는 악의 가득한 미소와 플리타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물었다.

“사생아가 뭔지 알아요?”

“……!”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이는 그런 플리타를 향해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사생아가 뭔지 아냐고요. 몰라요?”

“어……. 저기.”

플리타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저 꽉 움켜쥔 손이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이상하네? 공녀님은 잘 아실 줄 알았는데? 안 그래요?”

아이는 주위의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플리타를 보았다.

작은 몸집의 공녀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움츠러들어 있는 게 보였다. 아이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딱 봐도 만만한 꼬마였다. ‘공녀’라는 지위 때문에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소심하고 주눅 들어 있는 꼬마는 아무리 괴롭혀도 제 부모, 아니, 제 아비인 대공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할 테니까.

더구나 ‘사생아’가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단 말을 아비에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다름 아닌, 본인이 ‘사생아’인데. 그것이 제 아비의 크나큰 약점인데.

아이는 어리지만 영악하고 교활했다. 또한 오만하고 잔인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플리타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공녀’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괴롭힐 수 있는, 천한 평민의 피가 섞인.

“아아, 어려서 아직 그 뜻을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반쪽이라서?

천한 핏줄을 타고나서?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어른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이들끼리는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하기 싫어요, 공녀님?”

“아니에요.”

그때, 플리타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떨렸다. 하지만 플리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을 때, 더 이상 그런 떨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엄마, 결코 천하지 않아요. 나는 반쪽이 아니고, 우리 아빠, 그리고 우리 엄마의 딸이에요. 사생아가 아니에요. 그냥…… 나는 우리 아빠, 엄마 딸이라고요.”

플리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울음을 터뜨리며 헤이번을 찾지도 않았다. 그 단단한 모습에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짓던 아이가 인상을 썼다. 그리고 다시 뭐라 말하려는 순간, 플리타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플리타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플리타가 보여준 뜻밖의 모습에 불안해졌는지 일부 아이들은 초조한 시선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유치해, 전부.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플리타는 앙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존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공녀답지 않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이들에게 존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익!”

플리타가 그 말을 내뱉고 그대로 휙 돌아서자 방금 전까지 플리타를 괴롭히던 아이가 발끈하여 뭐라 외쳤다. 하지만 플리타는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제 귀를 꽉 막고 걸음을 옮겼다.

‘필요 없어.’

플리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말을 하는 친구는 없어도 돼. 나보다 유치한 언니, 오빠랑은 안 놀아.’

“……하나도 안 외로워. 하나도 안 슬퍼. 나한텐 로제도 있고, 하양이도 있고.”

플리타가 속으로 중얼거리다 말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혼잣말을 하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아이의 숨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플리타는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른 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고는 로제의 품에 안겨 투덜대기도 하고, 로제가 먹여 주는 간식도 냠냠 받아먹고, 하양이랑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고도 싶었다.

여기서, 저런 바보들이랑 있을 바에야.

“……나, 갈래. 로제.”

뒤늦게 플리타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귀족 아이들 앞에서는 눈물을 꾹 참았지만, 사실 플리타는 이제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아이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겠다고 헤이번과 약속했던 일마저 까맣게 잊고는 훌쩍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처를 이겨내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플리타는 제 아픈 마음을 달래줄,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찾았다.

가끔은 제 엄마였으면 싶은.

“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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