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페드윈 경.”
헤이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제야 페드윈이 너스레를 떨던 걸 멈추고는 이만 물러가겠다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물론 그에게서 받은 서류는 잘 챙겨둔 상태였다.
탁.
페드윈이 문을 닫고 나간 뒤, 헤이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제 호위 기사에게 벌게진 얼굴을 보일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는 중이었다.
빗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함. 그 속에서 잠시 있으려니 며칠 전 로제와 함께 차를 마셨던 날이 떠올랐다.
톡. 톡. 톡.
그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두드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그토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치미는 궁금증이었다.
사람을 시켜 사 온 불꽃놀이용 폭죽을 플리타에게 선물할 때도 아이의 곁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궁금해했다. 그리고 정원에 나가 함께 폭죽을 터뜨리면서도 제 시선은 로제를 향해 있었다.
“미쳤군. ……정말 미쳤어.”
헤이번은 그런 제 자신에게 당혹감을 느끼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 * *
“하양아! 드레스 찢어진단 말이야!”
“멍멍!”
강아지는 플리타의 타박에도 그저 마냥 신이 나서 아이의 주변을 맴돌며 꼬리를 흔들고 짖어대기 바빴다. 반짝이는 드레스를 이것저것 자꾸 갈아입으니, 강아지의 눈에는 신기한 모양이었다.
“안 되겠어요, 공녀님. 하양이는 잠깐 옷장 안에 넣어둘게요.”
“응? 으음……. 그렇게 해.”
플리타가 로제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이대로 놔둘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끼잉끼잉.
그런 제 운명을 눈치챈 것일까. 강아지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며 가련한 척 굴었다. 하지만 로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를 바구니에 담은 뒤, 옷장 안에 넣었다.
“멍!”
“여기서 얌전히 있어.”
강아지가 냉큼 바구니 안에서 앞발을 들고 일어서자 로제가 강아지의 까만 코를 톡 건드리고는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강아지는 재차 멍멍, 하고 짖으며 바구니 벽을 긁어댔다.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로제는 강아지를 향해 한 번 더 말을 하고는 옷장 문을 반쯤 닫았다. 옷장 문을 아예 닫아놓으면 어두컴컴해서 강아지가 겁을 먹을지 모르고,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플리타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걸 구경한답시고 바구니 밖으로 탈출을 꾀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콜록!”
강아지의 방해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금 드레스를 갈아입던 플리타가 기침을 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로제가 얇고 화사한 드레스를 준비하다가 걱정스럽게 아이를 보았다.
“열은 없는데…….”
“나, 안 아파. 아까 주치의도 다녀갔잖아.”
플리타가 로제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로제는 근심 어린 시선으로 플리타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공녀님. 우리, 다른 드레스를 입어요.”
“다른 드레스?”
플리타는 로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제가 만찬을 위하여 꺼내 놓았던 얇고 화사한 드레스를 전부 치운 뒤, 두툼하고 포근한 드레스를 꺼냈다. 그것을 본 플리타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나 이거 입어도 돼? 만찬에 다른 귀족들도 온다면서. 유모가 그럴 때는 최대한 화려한 걸 입어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래야 예뻐 보인다고.”
「그렇게 입어야 공녀님의 천한 피가 그나마 덜 가려질 거 아니에요!」
경멸 어린 투로 제게 내뱉고는 하던 유모의 말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제는 플리타가 감춘 유모의 말을 마치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단호한 투로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 예뻐 보이는 거, 물론 중요하죠.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그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요, 공녀님.”
로제는 플리타의 두 손을 잡고 아이를 보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따스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고 예뻐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에요. 공녀님은 그냥 공녀님 그 자체로도 반짝반짝 예쁘신걸요.”
“그냥…… 나 자체로도?”
플리타가 동그란 눈을 굴리다가 그녀의 말을 따라서 했다.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게다가 무엇보다도 공녀님께서 아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자꾸 기침을 하시는데 따뜻하게 입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나도 이게 좋아. 사실은 조금 추웠거든.”
비가 오고 있어서 날씨가 쌀쌀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있더니 이제야 솔직히 털어놓은 것이다. 로제는 그런 플리타를 보다가 웃은 뒤,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다음부터는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꼭 말씀해 주세요.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으응.”
플리타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언니 오빠들 많이 온다고 했지?”
“예, 인근 귀족가의 자제분들은 전부 오신다고 들었어요.”
“음…….”
음, 음, 음. 아이가 마치 노래를 부르듯 소리를 내더니 다시 로제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입만 달싹였을 뿐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로제가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기대되세요, 공녀님?”
“……조금.”
플리타는 로제의 물음에 쑥스러운 듯 몸을 살짝 비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찡그리고는 시무룩해졌다.
“근데, 다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아델라 언니도…… 나랑 친해지기 싫어했잖아.”
“싫어하신 건 아닐 거예요. 다만, 낯설어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요? 공녀님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낯을 가리시고는 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플리타의 입이 뾰족 나왔다. 그 순간, 옷장 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바구니 안에 있던 강아지가 냉큼 달려왔다.
“멍멍!”
“앗! 안 돼, 하양아! 이제 진짜 안 돼! 드레스 망가지면 큰일나!”
플리타가 기겁하여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강아지는 지치지도 않는지 의자 위로 저도 올라가겠다는 듯 앞발을 들고 깡충깡충 뛰었다.
그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강아지를 진정시킨 뒤, 플리타가 다시금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품에 안긴 강아지가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 거 같아.”
“……?”
로제는 플리타가 강아지를 쓰다듬다가 꺼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플리타가 콧등을 찡그리며 강아지를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얘는 나 안 싫어해. 그치?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문제야.”
“멍!”
강아지가 혀를 내민 채 헥헥거리다 말고 아이의 말에 대답하듯 짧게 짖었다. 로제 역시 플리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며 투덜거린 것과 달리 아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져서 다행이었다.
‘만찬회에서도 별일 없기를…….’
로제는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 * *
“긴장되느냐?”
헤이번은 만찬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제 옆에 서서 바들바들 떠는 플리타를 향해 물었다. 플리타가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속삭이듯 작게 대답했다.
“조금요.”
“긴장할 것 없다. 여기서 너보다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으니까. 아, 물론…….”
“아빠만 빼고요?”
플리타가 긴장감을 애써 털어내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헤이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고, 당당히 고개 들어라.”
“……네에.”
플리타는 헤이번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뒤쪽에 선 로제를 보고는 다시 헤이번에게 물었다.
“로제는 같이 안 들어가요?”
“그래. 필요하다면 백작 저의 하녀들이 시중을 들 거다.”
“흐응…….”
아이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그러나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쓰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공녀님.”
그런 아이의 마음을 달래듯 로제가 뒤편에 서 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플리타는 다시금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계속?”
“예.”
“진짜?”
“진짜요.”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듯 플리타의 얼굴에 서렸던 긴장감이 다소 옅어졌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변화를 깨닫고 로제를 향해 고맙단 뜻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그 직후, 집사가 다가오더니 헤이번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헤이번이 그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만찬장 문을 열고 안쪽에 고했다.
“대공 전하, 그리고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쪽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소란이 일었다. 헤이번과 플리타를 맞이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지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소곤대는 목소리도 들렸다.
헤이번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보게 되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플리타로서는 처음 접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플리타.”
그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플리타가 재차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헤이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내밀어진 그의 손을 보고는 냉큼 그를 잡았다.
헤이번이 제 손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딸의 손을 꽉 잡고 발걸음을 떼었다. 플리타의 보폭에 맞추어 조금 속도를 늦춘 채.
“대공 전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백작 부부가 곧바로 다가와 헤이번을 향해 예를 표했다. 헤이번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에 화답한 뒤, 입을 열었다.
“백작이 요 며칠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떠나기 전에 이렇듯 여러분을 뵙게 되니 반갑군요.”
그의 푸른 눈이 다른 귀족들을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저마다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여인들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뒤이어 만찬장 한쪽에 있던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정식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