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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오!
집 안에서 들려오는 들어오라는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지요, 전하.”
페드윈의 말에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하더니 이내 로제를 돌아보았다.
“로제, 왜 그러고 서 있지? 어디가 안 좋은가?”
“아……. 아니요, 전하. 그냥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로제는 그의 물음에 황급히 대답한 뒤, 플리타를 챙겨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소년을 업은 기사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치료사의 비좁은 집 안이 가득 찼다.
“어서 오십…….”
치료사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이내 로제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어제 왔던…….”
“안녕하세요. 어제 소화제를 받아 갔었지요?”
로제는 치료사의 입에서 혹여 다른 말이 나올까 싶어 서둘러 먼저 입을 열었다. 치료사가 그녀의 엉뚱한 말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이다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는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소화제……. 아아, 맞아요. 그랬지요. 그랬소. 험험, 그래, 약을 먹으니 속은 괜찮아졌소?”
“덕분에요. 약이…… 잘 듣더라고요.”
로제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의 모습이 어색해 보인 탓이었다.
“이곳에 왔었나 보지?”
“예. 어제…….”
“흠.”
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치료사에게 다녀왔다고 했고, 우연히 오늘 들른 이곳이 어제 그녀가 다녀온 곳이라는 점 외에는.
“험험.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아하, 그 아이가 아픈 거요?”
치료사가 헛기침과 함께 콧등에 안경을 걸친 뒤, 말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기사가 소년을 업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무엄하다! 감히 대……. 윽!”
“조용히 해라. 조용히. 아예 떠벌리고 다닐 거냐?”
‘대공 전하’를 외치려던 기사의 뒤통수에서 딱, 하고 소리가 났다. 페드윈이 냉큼 제 수하이기도 한 기사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친 것이다. 그러자 기사가 제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문 뒤, 업고 있던 소년을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소동에 헤이번은 조금 전 느낀 의아함을 그대로 덮어버리고 치료사에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쓰러졌네. 상태가 어떤지 봐 주게.”
“어디 한번 봅시다. 흐음…….”
치료사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소년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 힐끗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돈이 제법 많은 사람인 듯했다. 그러니 축제에 저렇듯 부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을 터.
‘가족이 없다고 하더니…….’
치료사의 시선이 헤이번에게서 로제,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는 플리타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는 괜한 호기심을 접고 소년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환자가 우선인 법이었다.
“고열에 기침, 그리고 피부에 발진이라…….”
치료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소년의 명치 아래를 눌렀다.
“으악! 아악!”
그와 동시에 의식을 잃은 듯 보이던 소년이 자지러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다지 세게 누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흠…….”
그 반응을 확인한 치료사가 미간을 긁적였다. 플리타는 그런 소년의 비명에 놀랐는지 로제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토닥이는 걸 힐끗 보던 헤이번이 치료사를 향해 질문했다.
“어떤가.”
“며칠 전에도 이 비슷한 증세를 보인 아이를 치료한 적이 있소. 이 녀석보다는 증세가 덜 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비슷하구려.”
“그럼 치료할 수 있는 건가?”
“뭐, 정확히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증세를 완화시키는 약을 쓰면 될 거요. 지난번 꼬마도 그랬으니까.”
치료사가 소년의 진료를 끝내고는 별것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제와 플리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헤이번이 그들을 힐끗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린 뒤, 돈을 꺼냈다.
“치료비는 이 정도로 될까.”
“중병은 아니지만 들어가는 약값이 꽤 비싸서 1그로스 정도는 받아야…… 헉!”
치료사는 중얼거리다가 헤이번이 내놓은 돈을 확인하더니 기겁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란 탓인지 그의 턱 밑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추, 충분하오. 그런데 보아하니 댁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 같은데, 그런 아이한테 이렇게 거금을 써도 되는 거요?”
“이왕 돈을 쓸 거라면 가치 있게 쓰는 편이 낫겠지. 그만 돌아가자.”
헤이번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페드윈과 다른 기사, 그리고 로제와 플리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치료사가 이채 서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침대 위의 소년을 보았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허름한 차림새의 소년과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저들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관계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아무리 베풀기를 즐겨 한다고 하더라도 축제 기간에 일부러 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소년을 데려와 치료를 맡기다니 말이다.
“인심 좋은 사람들이군. 흠…….”
치료사의 얼굴 위로 다시금 호기심이 올라왔다. 소년을 치료하느라 잠시 묻어두었던 궁금증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그들을 배웅하는 척 따라나섰다.
* * *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플리타를 쫄랑쫄랑 따라오던 강아지가 느닷없이 멍멍, 하고 짖는 바람에 치료사의 집을 나서다가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 틈을 타 치료사가 그들 뒤를 따라 나오다가 로제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가족이 없다더니.”
“……예?”
로제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들려온 치료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치료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플리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이 말이오. 아가씨를 쏙 빼닮았던데. 아, 혹시 조카인가? 그럼 내가 실수를 했군. 난 저 사내가 남편인 줄 알고…….”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로제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헤이번과 플리타를 애틋한 시선으로 잠시 보다가 쓴웃음과 함께 덧붙여 말했다.
“제가 모시는…… 분들이에요.”
“아하.”
치료사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플리타가 로제를 돌아보았다.
“로제, 안 가?”
“가야죠.”
로제는 아이를 향해 미소 짓고는 치료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치료사가 쯧쯧, 혀를 차고는 당부조로 말을 이었다.
“남의 집 일을 하는구먼. 쯧쯧, 이왕이면 남은 시간 동안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면 좋으련만……. 그나마 남은 수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그보다 좋은 게 없을 텐데 말이오.”
“…….”
로제가 그의 말에 그저 가만히 웃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치료사의 말이 옳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설령…… 제 남은 시간 중 일부를 갉아먹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제게 허락된 시간만큼은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것만이 로제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녀는 플리타를 향해 다가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서글프도록 아름다웠다.
* * *
“멍멍!”
“헤헷! 하지 마, 하양아! 나 다 씻었단 말이야!”
플리타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까르르 웃으며 강아지와 함께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로제가 아이의 잠자리를 정돈하다 말고 미소를 지었다.
유모가 봤더라면 뒷목을 잡고 당장 저 개를 치우라며 소리쳤을 터였다. 아니, 애당초 공녀님의 침실에 잡종 개가 웬 말이냐며 로제를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로제는 아이와 강아지가 함께 목욕하게 하고, 이렇게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놀게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설령 공녀답지 못한 행동일지라도 말이다.
“아! 재미있어!”
플리타가 강아지 침으로 범벅이 된 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강아지가 더 놀자는 듯 플리타의 무릎 위에 제 앞발을 올렸다. 로제가 그런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고는 침대 아래쪽, 두툼한 방석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주무셔야지요? 하양이도 자야 하고요.”
“응. 그런데……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플리타가 로제를 쳐다보며 눈꼬리를 내렸다. 로제가 가만히 웃은 뒤,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으응.”
“늦게 주무시면 내일 졸리잖아요. 그럼 내일 꾸벅꾸벅 졸게 될 텐데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하양이랑 햇빛이 내리쬐는 정원에서 놀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으응…….”
플리타는 로제의 말을 들으니 고민이 되는지 눈을 찡그렸다. 로제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아이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준 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놀고 주무세요. 하양이도 졸린가 보네요. 하품하잖아요.”
마침 강아지가 입을 벌리더니 하품을 했다. 플리타는 강아지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더니 방석 위에 몸을 웅크리는 걸 보고 덩달아 하품을 했다.
“흐아암. 알았어, 잘게.”
“잠깐만요. 얼굴 조금만 닦고요.”
로제가 젖은 손수건으로 플리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강아지가 핥아서 침으로 범벅이 됐던 얼굴이 그나마 말끔해졌다. 그 손길에 얼굴을 맡기고 있던 플리타가 헤헤, 하고 웃더니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있지. 아까 진짜 좋았어.”
“축제 구경요?”
로제가 제 품에 안긴 플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로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더니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물론 축제도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게 있었어.”
“……?”
아이의 말에 로제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플리타가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한번 맞혀 봐!”
“음……. 강아지요?”
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대 밑에서 곤히 잠든 강아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플리타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